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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진 Apr 27. 2021

[넷플릭스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포가 있습니다.


*


나는 IMF 세대다. 그때는 초등학생이었고 지금보다 어린이들의 인권이 중시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우리 학교는 후진 동네에 있었다. 화이트칼라 부모가 적었다는 의미다. 혹자는 깡패동네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깡패를 만난 적은 없다. 대학을 나온 부모도 몇 없었다. 못 배웠다는 것 때문에 깡패라고 불렸는지는 모르겠다.

아빠가 실직한 아이들은 손을 들라고 해서 몇몇이 쭈뼛쭈뼛 손을 들었다. 나는 안 들었다. 아빠는 집에 있었다. 회사에 나갔을지도 모른다. 일용직 일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꽤 긴 시간 집에 있었던 것 같고, 또 꽤 긴 시간 동안 밖에 있었다. 엄마가 일을 나가기 시작했다.

어떤 아이들은 급식비를, 방과후학교 수업료를 지원받았다. 나는 손을 안 들었으니 아무것도 지원받지 않았다. 우리 부모는 극소시민이었기에 일을 크게 벌이는 일이 없었고, 다행히 그래서 크게 말아먹은 적도 없었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그런데 만약 그런 적이 있었다면 그건 부모의 대단한 배려였겠다.

아무튼 IMF는 그렇게 왔다. 학교에서 우리나라가 크게 빚을 졌다고 배웠다. 우리가 다 같이 갚아야 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집에 가지고 있던 금을 다 내놓았다. 우리집은 내놓을 금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전국적으로 '아나바다'운동을 했다.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자는. 학교 차원에서 소소하게 벼룩시장 같은 걸 했다. 아이들은 그게 재미있었는지 옷이며 학용품 같은 걸 갖고 와서 내다 팔았다. 

'부도'의 개념을 그때 알았다. 몇몇 친구들의 집이 부도가 났다고 했다. '빨간 딱지'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국가에 우환이 있으면 가장 먼저 뛰어들어 얼른 해치워버리는 국민성 덕에 IMF 금융위기는 길지 않았다.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에 끝났다.

그리고 그것이, 몇몇 아이들에게는 깊숙이 숨겨진 트라우마가 되었다. 언제 부도가 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가난에 대한 공포. TV에서 계속 들려오는 누군가의 자살. IMF 탈출의 승리감에 고취되어 어떤 부분들은 철저히 감추어졌다.


출처: 네이버 영화


고려종합금융에서 근무하는 증권맨 윤정학은 신입사원 인솔 후 버스에서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린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을 빠져나가고 있고, 라디오에서는 연신 폐업했다는 기사가 흘러나온다. 경제호황이라는 뉴스와는 반대로 실물경제가 무너지고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그 뒤로 종금사를 퇴사한 윤정학은 투자회를 연다. 이 나라는 곧 망한다. 그러니 거기에 베팅을 하자. 하지만 뉴스에서는 한국경제의 눈부신 성장만 말하고 있었으므로 아무도 믿지 않는다. 다만 노신사와 오렌지족, 두 사람만이 윤정학을 따른다. 


그 시점, 한국은행의 한시현 팀장은 위기를 감지하고 총장에게 알린다. 경제부 수석을 만나 위험성을 알리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재정국 차관은 한시현을 말을 시종일관 무시한다. 


윤정학은 통화가치가 떨어지면서 환율이 미친듯이 오를 것을 예상하고 달러를 사들이고, 얼마 남지 않은 국가 부도 상황에서 한시현만 고군분투한다. 윤정학을 따르는 오렌지는 달러 환전을 통해 돈을 벌게 되자 엄청나게 들떠있는데, 윤정학은 돈 벌었다고 좋아하지 말라며 오렌지족의 뺨을 때린다. 뭐, 국민들은 죽어가는데 그걸 이용해서돈을 버는 마음이 석연치는 않았을 거다.


그리고 한편, 실물경제 쪽에서 한갑수는 미도파백화점과 5억짜리 계약을 따내고, 현금이 아니라 어음으로 대금을 지급받는다. 하지만 미도파백화점의 부도로 그 어음은 휴지조각이 된다. 그때 다 같이 어려우니 대금을 천천히 달라는 거래처도 있다. 


IMF만은 절대 안 된다는 한시현과, IMF의 제안을 승낙해야 한다는 정부 측의 줄타기가 시작되는데, IMF 측 요구가 민생을 절망으로 빠뜨릴 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정부는 IMF 측과의 만남마저도 비밀에 부쳤다. 대기업이 줄도산하고, IMF에 돈을 빌려야 할 만큼 외화가 바닥났는데도 정부는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한갑수는 결국 망하기 직전, 자신을 기다려준 거래처에 부도어음을 준다. 거래처 사장은 자살하고, 그것이 돈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갑수도 어떻게 해 보려고 했다. 이미 대출도 불가하고, 금융사마저도 도산하고 있는 상황. 그때 동생을 찾아간다. 동생이 바로 한국은행에 다니는 한시현이다. 


줄줄이 망하기 시작하자 아파트들이 대거 헐값으로 나왔다. 윤정학 일당은 강남 아파트들을 아주 싼값에 사들인다. 누가 그 집에서 자살을 했든 말든,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결국 정부는 IMF의 요구를 다 받아들인다. 그때부터 구조조정, 비정규직화, 자본시장 개방 등 지금 우리가 아는 사회가 만들어졌다.


물론 이 영화가 100퍼센트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그 시절, 내가 초등학생임에도 뉴스에서 우리 국민들이 사치를 하고 해외여행을 너무 많이 다녀서 외화가 동났다는 걸 봤다. 우리 국민들의 잘못이라고 했다. 그러니 우리는 금을 모으고 허리띠를 졸랐다. 이 영화는 국민들을 탓하지 않는다. 


그 시절, 가진 걸 내 놓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아둥바둥했던 사람들은 그냥 그렇게 살고, 위기를 기회로 바꾼 사람들은 부자가 되었을 테다. 강남에 아파트 몇 채 사두었다면 지금 가치가 얼마나 될까. 영화 후반, 윤정학은 컨설팅회사 대표로 승승장구하고, 오렌지 역시 조금은 차분해진 모습으로 그와 함께 한다. 윤정학과의 점심식사 이벤트는 몇 천만 원이 있어야 참여할 수 있다. 여전히 돈밖에 모르는 놈이다.


한국은행에서 나와 혼자 일을 하는 한시현의 모습도 비춘다. 1997년으로부터 20년 후, 한국에 또 다시 위기가 온 모양이다. 한 무리가 와서 한시현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들은 한시현이 퇴사 전 써놓은 보고서를 발견했다. 한시현은 그들을 돕기로 한다. 


부도어음으로 간신히 살아남은 한갑수. 아들이 커서 면접을 보러 간다. 한갑수의 공장에는 외국인 노동자밖에 없다. 한갑수는 아들에게 "사람을 믿지 말라"고 조언한다. 지금 우리는 불신의 시대를 살고 있다.


*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이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물론 나라를 지키려고 했던 한시현을 선으로 볼 수도 있겠다. 나라의 위기를 통해 이익을 본 윤정학을 악으로 보기는 어렵다. 누구든지 위기에서도 기회를 잡는 사람은 잡는다. 무능한 국가 관료는 악이지만, 보수적인 집단에서 그런 일은 왕왕 일어나곤 한다. 부도수표를 받고 부도수표를 낸 한갑수는 어떤가.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야만의 시대였다.


우리는 단기간에 IMF를 졸업하고,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남은 가치는, 내 것을 지키지 않으면 누가 뺏어갈 것이라는 것. 자신의 가치보다 이익을 우선에 둔다는 것, 이타적인 행동은 손해라는 생각 등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회를 헬조선이라 부른다. 무한경쟁, 비정규직화, 박탈감, 황금만능주의와 천민자본주의. 


종종 IMF를 겪은 아이들의 트라우마를 생각한다. 그 아이들은 자라서 단군 이래 최고 스펙을 가진 동시에 88만원 세대, 4포 세대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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