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바위를 바라보며, 금강산 화암사
마니차를 돌리며
주차장에서부터 화암사에 가는 길은 꽤나 긴 언덕이었다. 언덕을 한참 올라 화암사에 도착하니 내가 좋아하는 산속 절의 향기가 솔솔 올라왔다.
가기 전에 작은 거짓말을 하려다 들킬뻔한 일이 있었다. 처음으로 부처님께 소원 대신 잘못을 빌었다. 용서해 달라고 비는 일은 아무도 용서하지 않았는데 회개했다고 믿는 어떤 이들의 변명 같아서, 대신 "다시는 작은 거짓이라도 꾸며내지 않는 선량한 삶을 살게 해 주세요."하고 빌었다.
절을 둘러보니 '미륵전까지 3분'이라는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아마 한참 언덕을 올라온 사람들이 힘겨워 미륵전을 안 보고 가는 경우가 많았나 보다. '겨우 3분이면 가는데 안 볼 거야?' 하는 것 같아 천천히 미륵전에 올랐다.
미륵전에 오르는 길엔 마니차가 줄지어있었다. 마니차는 티베트 불교에서 사용하는 경전이 들어있는 수행도구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원통이다. 몽골에 갔을 때 처음 봤던 기억이 났다. 마니차를 힘껏 돌리면서 미륵전으로 가는 길을 걸었다. 3분 남짓 걷자 커다란 부처님이 나를 반겨주었다.
언젠가부터 인생이 그냥 무탈하게 흘러가는 것에 감사하게 됐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인생의 주인공이라고, 대단한 이벤트가 있어야만 한다고, 꼭 무언가 닥쳐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이젠 그렇지 않아도 좋다.
한동안 아주 많이 힘든 시간을 견뎠다. 무기력했고,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 가기도 힘들어 눈물이 났다. 도저히 걸을 힘이 나지 않아 주저앉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의지의 문제라고 말할 때마다 정말인가 싶어 속앓이도 했다. 점점 심해지는 무기력과 우울이 나를 덮쳐왔던 시기가 지나고 이제 어떤 無의 시기가 온 것만 같다.
어떤 날에는 음악회를 갔는데 주제가 '사랑'이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지금, '사랑'이라는 건 굉장히 무미건조한, 마치 단물이 다 빠져서 이젠 고무 맛조차 안 나는 껌을 씹어대는 일 같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이 없어도, 인생이 無여도 여전히.
나는 행복한가?
인생에 수많은 극적인 행복이 지나갔고 또 오겠지만, 마치 욕망과 고행의 양극단을 떠나 보리수 아래서 선정에 든 부처님처럼, 어쩌면 지금이 완전한 기쁨의 시간인 것도 같다.
저 멀리 수바위가 지키고 있는 화암사에서 어린아이가 된 듯 마니차를 힘껏 돌려본다. 나는 어쩌면 無가 아니라 행복 어딘가의 경계에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