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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 Jun 21. 2024

가리어진 길



#런린이#초보런#길게 달리기#취미런#야간런



뛰고 싶다.  

하지만.. 밖에 나가는 순간  타노스의 먼지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어  버릴 것 같은 무서운 폭염과 태양이 나를 점점 집에 묶어두고 있다.

에라 모르겠다....

퇴근 후에 강아지들과 널브러져  집순이의 레벨을 업시키며

정성껏 고기를 굽듯 몸을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으며 의미 없는 쇼츠를 넘기다 보니

이내 뜨거운 태양이 밝은 달과 바통터치를 한 후였다.





어둑해진 창밖을 보며

"나가보자 VS 밤은 위험해 "를 주제로 머릿속 긴급협의회가 열렸다.


나가보자 측 주장

 아직 습하지 않은 날씨라 뜨거운 태양볕만 없다면 충분히 러닝 할만합니다.

 지금 두 시간째 폰만 붙잡고 있었잖습니까? 아 네 물론 휴식도 중요합니다만 이미 충분히 휴식은 취하지 않았습니까? 허리랑 목 아프지 않으세요?             

 이렇게 밤을 두려워하시다가는 여름 시즌엔 주말러닝밖에 할 수가 없다고요.

  남편 있을 때 같이 밤산책 많이 해봤잖아요. 사람들 많은 곳으로 다니면 위험하지 않아요. 왜 나가보지도 않고 미리 겁을 내요? 아... 설마 러닝이... 귀찮은 건 아닌 거죠?




밤은 위험해 측 주장

 오~ 안 돼요 안돼.  지금 온도를 봐요. 아직 28도 예요. 해가 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더워요. 괜히 무리하지 말라고요.

  지금 몇 신줄 알아요? 8시가 넘었어요.  지금 남편도 없이 어딜 혼자 야밤에 나가겠다는 거예요?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 줄 몰라요? 거참 겁도 없으시네..             

  지금 뛰고 싶어 하는 길이 산이 포함되어 있는 길이잖아요. 아 물론 산이라고 하기엔 낮고, 동네 언덕배기 정도 되는 잘 정돈된 공원길 이긴 하지만 어쨌든 산길인데 거길 깜깜한 밤에 가겠다고요?  지금 제정신이에요?




양측 주장이 팽팽한 가운데

긴급협의회 결과는 일단 나가보는 것으로  끝이 났다.

뛰고 싶은 마음이 두려움보다 컸고, 혼자 가보지 않았다고 미리 겁을 낼 필요도 없고 , 나가봐서 영.. 무서우면 다시 돌아오면 될 것 아닌가....



 오케이 렛츠고!

더위에 지칠 수 있으니 새로 산 물병도 챙겨서 혼자 뛰는 첫 야간러닝을 나섰다.





나오자마자 알았다.

괜한 걱정을 했다는 것을...

새벽 한두 시도 아닌 8시 조금 넘은 시간이라 산책하는 사람, 퇴근길, 학원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

 등등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었고, 가로등도 촘촘히 있어서 위험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야밤에 마구 뛰어다니고 있는 나를  사람들이 더 무서워할 듯..--;;)




신호등을 건너 공원방향으로 본격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아... 역시 나오길 잘했다.

해가 지고 나니 바람도 살랑살랑 불고 습도도 낮은 편이라 뛰기에 아주 적당한 날씨였다. 게다가 태양이 없으니 얼굴 탈 걱정도 없었고, 고글도 안 써도 되니 훨씬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대망의 산길을 지날 차례다.

다른 길로 돌아갈까? 다시 머릿속 긴급협의회가 열렸으나

산으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언덕연습도 해볼 겸, 밤러닝 코스 점검도 해볼 겸 산길로 들어섰다.

산길이라고는 하지만 호수공원과 이어진 작은 동산이라 잘 정돈된 길이고

다행히 산길에도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불안한 마음이 금세 사그라들어 신이 나게 뛰었다.




야밤에 남편의 보호에 의지하지 않고

산책하는 사람들 틈에서 안전하고 건강하게 뛰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멋있었다.

자아도취런으로 건강한 내 모습에 잔뜩 취해 열심히 뛰었더니 어느새 호수공원이다.

혼자 맞이한 호수공원의 밤풍경은

'혼자 하는 밤러닝'이라는 '가리어진 길'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고

씩씩하게  뜀박질을 해서 여기까지 잘 도착한 나에게 수여하는 선물처럼

아름답고 화려했다.


뜨거운 태양 대신 떠있는 따뜻한 달님



밤은 위험하다며 집에만 있었다면 절대 맞이할 수 없었을 이 아름다운 풍경은

가보지 않은 길, 가리어진 길에 대해 미리 겁먹지 말고, 쫄지말라는 일종의 메시지 같기도 했다.




10k 정도만 뛰려고 했는데.. 뛰다 보니 기분이 너무 좋고 몸이 가벼워서 14K 나 뛰었네.

중간중간 약간 빠르게 뛴 구간도 있었지만 가장 내 몸이 좋아하는 속도로 천천히 재미있게 뛰었다.

집에 도착하니 벌써 10시 30분이  지나있었는데, 평상시면 침대에서 쏟아지는 졸음을 맞이하거나 때론 이미 꿈나라인 시간까지 운동을 했다니.. 뿌듯함에 다시 한번 좋은 기분을 느껴본다.




10월 서울레이스에 첫 하프를 신청해 놓았기에 러닝을 계속해야 하고,

또 러닝 자체가 너무 재미있는데 무더운 여름을 어떻게 잘 보내야 하나..  고민이 깊어지던 날들이었는데

'혼자 하는 야간 런'이라는 '가리어진 길'이  

이제는 '내 맘대로 뛸 수 있는 시원한 야간 런'이라는 '훤히 열린 길'로 바뀌어서 너무 좋다.

두려움과 귀찮음을 떨치고 새로운 길을 잘 개척한 나! 아주 칭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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