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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 Nov 27. 2020

통증을 척도로 표현해도 될까요?

저기요..초등학교 2학년 맞으세요?

    

  아이들이 하교하고 난 3시 의 초등학교 보건실, 방과 후 교실로 여전히 환자들은 많지만 일과시간에 비하면 한가하다. 향긋한 커피 한잔으로 열심히 일한 나에게 작은 보상을 한다.

  삐그덕 힘없이 열리는 보건실 문, 하얗고 귀티 나는 얼굴을 가진 2학년 남학생이다. 왠지 무언가 지쳐 보이기도 한다.

“어디가 아파서 왔을까?”

“목 아픔을 동반한 두통이 있어서 왔어요. 아픈지는 어제부터 조금씩 아팠는데 오늘 방과 후 수업하다 보니 서서히 통증이 심해지는 것이 느껴져서 왔어요.”

으잉? 동반? 통증? 서서히? 뭐야... 초등 2학년에 어울리지 않은 고급진 단어들의 향연에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한다.

“우리 친구, 2학년 아니었어? 어려운 단어를 많이 아네?”

“네 2학년 맞아요. 저는 의사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거든요.”

“아.. 그렇구나. 의사 선생님이 되고 싶구나.  어 그래그래. 다시 한번 아픈 곳 좀 얘기해줄래?”

“아 네. 제가 아픈 곳은 요. 목 아픔을 동반한 두통이 있는데요. 두통을 1에서 10으로 치자면 3 정도에 해당하는 것 같고요 목 아픔은 1 정도인 것 같아요. 어제부터 조금씩 아팠는데 오늘 방과 후 수업하면서 서서히 목 아픔을 동반한 두통이 심해지는 것이 느껴져서 왔어요.”

“어. 그... 그래”


뭘까... 의사가 되고 싶어서 드라마를 많이 본건가? 아.. 아빠가 의사인가 보네. 그래서 진료하는걸 많이 봤었나? 호기심을 가득 품고 평소와 같이 열을 재준 뒤, 목이 부었는지 체크한다.

“근데 친구야. 너 왜 의사 선생님이 되고 싶어? 아빠나 엄마가 의사 선생님 이시니?”

“아니요. 의사 선생님 아니에요. 저는 다른 사람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의사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요즘엔 엄마가 집에 의학책들이 많이 사다 놓으셔서 그 책을 많이 봐요. 그래서 저는 의사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 학원 스케줄이 굉장히 많아서 바빠요.  조금 있다가는 영어도 가야 하고 수학도 가야 해요. 의사 선생님이 되려면 학원을 많이 다녀야 한데요. 사실 저는 의사 선생님이 안돼도 상관없어요. 소방관이나 경찰관도 좋아요.”


통증을 척도로 표현하는 똑똑한 아이의 꿈 이야기를 들으며 그 꿈이 정말 있는 그대로 아이의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로 자라줬으면 하는 ‘엄마의 꿈’ 이 아닌 ‘진짜 아이의 꿈’ 말이다. 스카이 캐슬의 엄마들처럼 서울의대를 부르짖는 엄마에 의해 만들어진 꿈이 아니길 마음속으로만 기원해보며 뿌리는 가글을 분무해주고, 집에서 따뜻한 물 마시고 푹 쉬어야 한다는 상투적인 치료를 빠르게 마쳤다. 



  며칠 후 점심시간의 보건실, 하루 평균 120명의 방문자 중  60% 이상이 점심시간에 집중된다. 밥 먹다가 끌려와 치료하던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목구멍에 밥 덩어리가 걸려있는 거 같이 설움이 밀려온다. 다행히 올해부턴 같이 환자 진료를 봐주시는 선생님이 오전 중이나마 계시므로 밥 먹다가 끌려와 치료를 해야 하는 일은 없다. (그래서 많이 먹는다. 그래서 배가 나오나? 다 좋은 건 아니군) 오늘도 어김없이 환자가 밀려온다.


"줄을 서시오! 줄을 서시오!"

밀려오는 초등학생 환자들의 질서를 잡으며 치료에 매진한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환자들 틈에 낯익은 하얀 얼굴의 남학생이 서있다.

“우리 친구 어디 아파서 왔을까?”

"울렁거림을 동반한 두통이 있어요"

 얼굴을 확인한다. 얼마 전 통증을 척도로 표현하던, 의사가 되고 싶어 의학서적을 많이 읽는다는 그래서 학원을 많이 다녀 스케줄이 바쁘고 힘들다는 사실은 의사가 아니어도 상관없다던 그 2학년 남자 아이다. 

환자가 가장 많은 시간이므로 이것저것 얘기를 나눌 시간 따위는 허락되지 않는다. 열을 재고, 목을 살피고, 문진을 한 뒤, 목이 부어 있어 초기 감기 진단을 내리고 물을 많이 먹도록 하고, 빨아먹는 트로키를 입에 물리며 진료를 마친다.


치료인지 보건실 환자 해치우기 인지 헷갈리는 상투적인 치료를 하고 나면  점심시간의 환자폭풍이 지나간다.

 가그린으로 대략 헹궈놓은 이빨을 정성껏 닦고, 학생들이 적어 놓은 진료기록을 컴퓨터로 옮겨 놓는다.

"음 요 친구는 요렇게 처치를 했었지.  어? 얘는 계속 아프네. 병원가 보게 집으로 문자 한 통 보내줘야겠다." 

   



잉?  이건 뭐지? 어디서부터 아팠는지 적는 란에 "학교"라고 쓴 뒤 굳이 "shcuool"이라고 써놨다. 스펠링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는다. 가끔 고학년 들은 바쁜 보건 선생님의 눈을 피해 기록지에도 장난식으로 적기도 하지만 이건 좀 다른 느낌이다. 누구지?              

이름을 보니 그 아이다. 두통이 10중에 3만큼 아프다던, 목 아픔을 동반한 두통이 있다던,  의사가 되고 싶다던, 학원 스케줄이 많아 바쁘다던, 딱히 의사가 아니어도 상관없다던 하얀 얼굴의 그 아이.. 

뭘까.. 나에게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일까?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많이 알고 있어야 공부를 열심히 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그냥 단순한 장난에 내가 온갖 망상을 하고 있는 것 일 수도 있다. 


공부 공부 자나 깨나 공부를 외치며 유치원 들어가기 전부터 휘몰아치는 공부를 쏟아부은 덕분에, 공부의 씨앗이 초등 3학년 때 싹 말라버렸던 못난 엄마를 둔 내 아들 윤서가 생각나는 아이야. 

부디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였으면 좋겠네. 그저 나의 쓰잘 떼 없는 걱정이었으면 좋겠어. 혹시 모르니 담임선생님한테 얘기는  해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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