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웃음이 너희 인생의 한 장면이 되기를..
보건실 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빨간망토를 두른 한 여학생이 수줍게 들어왔다.
“선생님, 인공눈물 좀 주세요.”
빨간 망토 아래로 하얀 브라우스, 빨간 레이스 스커트에, 반짝이는 눈동자까지 그야말로 디즈니 만화 주인공처럼 예쁜 아이였다.
그렇다. 오늘은 3학년 졸업앨범 컨셉 촬영 날이다.
빨간망토 아가씨를 시작으로 알라딘 복장의 반짝이는 조끼를 입은 아이,
복고풍 의상을 입고 레트로 선글라스를 낀 아이,
진주 목걸이와 티아라를 얹은 미스코리아,
개화기 시대 양장을 곧추 세워 입고 부채를 든 소녀까지—시대와 세계를 넘나드는 인물들이 하나 둘 보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독특한 복장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들은 평소보다 한껏 들떠 있었다.
긴 드레스 끝을 발로 살짝 밟으며 들어온 미스코리아 복장의 아이는 살짝 민망한 듯 수줍게 웃었고, 알라딘 복장의 남학생은 우스꽝스러운 헤어밴드를 고치며 스스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복장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도 들으며, 한참을 같이 정신없이 웃고 있다 보니, 이번엔 남학생 두 명이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들고 들어왔다.
“선생님, 혹시 붕대 좀 감아주실 수 있을까요?”
“너희는 무슨 컨셉인데 붕대가 필요해?”
“…좀비요.”
그러고 보니 축 처진 어깨, 짙은 다크서클을 분장한 눈 밑, 흰 셔츠 위에는 무심한 듯 붉은 물감이 묻어 있었다.
“아까부터 해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돼요.”
그 중 한 명이 팔을 번쩍 들어 보였는데, 손끝에 매달린 엉성한 붕대는 당장이라도 바닥으로 떨어질 듯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사진처럼 가능할까요?"
학생이 보여준 사진에는 축구선수가 손목부터 손가락까지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손가락 2개만 감고 나머지는 안 감은 상태의 붕대였다.
원하는 모양으로 척척척 감고 있으니
“크— 역시 전문가시네요.”
입을 모아 감탄하는 모습에 진심인지 장난인지 몰라도 꽤 으쓱해졌다.
"선생님 저도 좀.."
"너는 어떻게 감고 싶은데?"
"아 그 약간 쎄보이는 거 있잖아요. 복싱선수가 붕대 감은 느낌처럼 엄청 강력해보이는 느낌이요"
"붕대로 그런 느낌을 낼 수가 있나...? 하여튼 해 봐줄게"
또 슥슥슥 감으니 양쪽에서 또
"크~~쎄보인다 쎄보여" 감탄사가 쏟아진다.
보건선생님이 ‘좀비 붕대 전문가’가 되는 날이라니. 보건실은 늘 생각지도 못한 역할로 나를 부른다.
“근데 왜 하필 좀비야?”
“여자애들은 공주하고 요정 하고, 우린 좀비 하래요.”
“어머머머머 뭐야!” 웃으며 받아쳤더니,
“그러니까요~ 그래도 뭐 걔네들이 이쁜 게 더 낫죠”
한 아이는 눈을 찡긋했고, 다른 아이는 혀를 살짝 내밀며 장난스럽게 손사래를 쳤다.
사실, 고3 아이들은 평소에 물먹은 솜처럼 늘 축 처져 있다.
어깨에 늘어진 피로와 한숨이 무거운 공기처럼 달라붙어 있고, 눈은 무기력하고,
표정은 ‘지금 말 걸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고, 발걸음도 무겁다.
그도 그럴 것이다. 인생 첫 번째 거대한 숙제, ‘대입’이라는 바위를 혼자 끌고 가는 시기니까.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이들이 오랜만에 ‘아이’ 같았다. 공주가 되고, 좀비가 되고, 시대를 넘어 시간여행자가 되어, 깔깔대며 웃고, 사진을 찍고, 얼굴에 반짝이와 피 분장을 칠하면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살아 있었다.
그 웃음들 속엔 성적 고민도, 진학 압박도 없었다. 그저 반짝이는 눈빛과 친구들끼리의 농담, 손끝에 남은
반짝이 풀과 붕대 끝에서 묻어나는 장난기가 전부였다.
오랜만에, 아이들이 아이답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나는 나의 고등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아침마다 친구들과 강당에서 서태지 노래를 틀어놓고 춤을 췄던 그 시절.
딱히 잘 추지도 않았지만, 허우적대면서 깔깔거리며 웃던 기억.
중창단 공연이 있던 날은, 하얀 블라우스에 까만 치마를 입고 다른 남학교 강당 무대에 섰던 기억도 났다.
무대 옆에 앉아 대기하던 그 순간의 떨림과, 관객석에 가득한 낯선 남학생들 앞에서 불안했던 시선…
그 수줍고도 설레던 감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아이들도 언젠가 오늘을 떠올리겠지.
이 웃음과 소란스러움, 분주함과 친구들의 얼굴, 보건실에서 감았던 좀비 붕대까지.
그날이 너희 인생의 한 장면이 된다면, 나도 그 장면 어딘가에 같이 있었단 게 참 감사하다.
오늘 너희와 이 시간을 함께 나눌 수 있어서, 나는 참 영광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