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관리의 하루
하교시간 종이 울리고, 아이들이 쏟아져 나가는 시간이다.
나는 의자에 머리를 기댄채 , 방금 끝난 위기관리위원회를 되새겨 본다.
보건실이란 공간은 환자들로 북적이기도 하고,
마음의 일렁이는 파문을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며칠 전, 한 여학생이 팔에 작은 상처를 안고 찾아왔는데, 팔 바깥쪽 이었고, 상처가 2cm 미만으로 아주 작았기에, 소독을 해주면서 의례적으로 어떻게 다친거냐고 물어보았다.
“자해했어요.”
아이의 툭 뱉은 말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자해가 확실해 보이는 상처를 갖고 와서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숨기기 바쁜데,
이 아이는 마치 누구라도 자신을 알아봐 주길 오래도록 기다렸다는 듯 자해했다고 말하지 않는가.
누군가에게 발견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내면이 담긴 말이었던 것 같았다.
"아이구 이런.."
아이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 그 마음의 상처까지 어루만지듯 상처를 정성껏 소독해주었다.
상처는 2cm도 되지 않고 깊이도 앝았지만, 문제는 크기보다 맥락이었다.
수업 시간에, 그것도 교실에서 자해를 한 것이다.
유난히 여려보이는 그 아이의 눈을 보며 어떻게 전후사정을 물어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나의 마음을 읽은 듯 본인이 왜 힘든지 술술술 얘기를 시작했다.
“웹툰 작가가 되고 싶어요. 그런데 엄마는 시각디자인 하래요. 학원도 시각디자인으로 등록해버렸어요.”
아이는 그림을 좋아했지만, 공부와 성취를 중시하는 엄마와의 갈등이 극에 달했고,
엄마가 최종 허락한 진로가 '시각디자인'이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아이에게 자신의 꿈이 거부당하고, 자아가 무시당한 경험으로 남은 것 같았다.
내면의 자기 존재에 대한 불신과 좌절감이 쌓였고, 이는 자기파괴적인 '자해'라는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특히 우울증 약을 복용 중이었던 상황에서, 엄마의 꾸중과 성적 하락이 겹치며 아이는 더 큰 죄책감과 무력감을 느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오늘. 그 아이로 인해 위기관리위원회가 열렸다.
자해 사건 이후 나는 담임교사와 상담교사에게 연계했는데, 상담교사와 더 깊은 상담을 진행하던 중,
구체적인 자살 계획까지 세웠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사안이 심각하여 보호자도 동석했다.
회의 내내 표정의 변화가 크지 않고 담담하던 엄마는, 회의 후반에 가서는 눈물을 터뜨렸다.
아이의 고통을 학교 선생님들보다 뒤늦게 헤아렸다는 자책, 그동안 몰라주었던 미안함,
그리고 아이의 자살계획에 대한 두려움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던 듯하다.
교장선생님, 교감선생님, 생활부장 등 모두가 그녀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넸다.
부모로서, 교사로서, 우리 역시 자녀의 미래를 걱정하며 때때로 선의의 조언이 강요로 받아들여졌던 경험이 있었기에, 엄마의 혼란과 눈물에 누구보다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우리 모두의 의견은 '아이를 먼저 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단지 생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존재 자체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아이가 아이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다짐같은 것 이다.
아이의 선택, 아이의 말, 아이의 감정이 무엇보다도 먼저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엄마의 걱정, 엄마의 계획, 엄마의 기대는 분명 사랑에서 비롯되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사랑은 아이를 숨막히게 하고 있었다. 아이가 살아있어야, 그 어떤 미래도 존재할 수 있는것 아니겠는가.
살아 있어야 꿈도 바꿀 수 있고, 관계도 회복할 수 있다. 생존보다 앞선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가 자신의 언어로 말할 수 있도록,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도록, 지지하는 사람이 엄마와 학교가 되어보자고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학교에서도 상담 선생님은 학생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며 계속 연결고리를 만들기로 했고, 담임 선생님은 교실에서의 작은 변화들을 관찰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보건실에서 언제든 쉬어갈 수 있는 공간과 따뜻한 말 한마디를 준비해두기로 했다. 엄마도 앞으로는 아이가 자신의 언어로 삶을 다시 써나갈 수 있도록 따뜻하게 지지하며 함께 걸어가겠다는 마음을 내비쳤다.
자해사건 이후로도, 아이는 자주 보건실을 찾는다.
산소를 입에 대고 천천히 심호흡하면서 안정을 찾기도 하고, 따뜻한 차를 마시며 잠시 이야기를 하고 가기도 한다. 나는 아이가 보건실에 올 때마다 자기 감정을 말할 줄 아는 용기, 아프다고 표현할 줄 아는 그 솔직함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얘기해주고 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너는 잘 될 거라고.
이렇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너를 스스로 살리고 있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