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한 익숙함을 경계하는 자
새로운 학교로 발령을 받고, 전임 보건교사에게 인수인계를 받던 중이었다.
보건실 구석 수납장에 빼곡하게 정리된 학생들 책더미가 눈에 띄었다.
신학기 교과서로 보이는 책들이었고, 그 양이 한눈에 봐도 꽤 많았다.
“이건 무슨 책이에요?”
“어머 선생님 미안해요. 이거 아이들이 너무 무겁다고 해서 맡아 준건데 걔네들 오면 좀 주시겠어요?”
당황스러웠다. 한두 명 분량이 아니라, 거의 10명 이상의 분량은 될 법한 양이었다.
순간, ‘이 선생님이 특별히 친한 아이들이 있었나 보다’ 싶었다.
나도 보건동아리 아이들이나 건강상담을 자주 하던 학생들과는 어느 정도 유대감이 생기면, 작은 부탁 정도는 적정선에서 들어주기도 하니까 말이다.
보건실은 수납공간이 부족해서 학생들 교과서까지 맡아두면 본래 업무에 필요한 공간조차 부족해지고, 다른 아이들과의 형평성을 고려해야 해서 가급적 그런 부탁은 들어주지 말아야 하는데... 맘속으론 살짝 불편함을 느꼈지만, 책들은 학생들이 가져가면 되니까 전임자가 괜히 불편할까 싶어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개학 첫날 1교시. 정신없이 환자들을 응대하고 있던 중이었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무리의 아이들이 우르르 들어와 수납장을 열기 시작했고, 놀란 나는
"너희들 지금 뭐 하는 거니?"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중학교도 아닌 고등학교에서 이렇게 무례한 상황은 사실 처음 겪었다.
그제서야 아이들은 나를 쳐다보더니,
“어... 보건샘 바뀌었네? 우리 책 맡겨놓은거 있어서 가지러 왔는데요.”
무례하고 당당하며, 마구잡이로 보건실 수납장을 뒤지는 것에 대한 사과조차 없는 말투와 눈빛.
내가 기대했던 살갑고 예의바른 학생들이 아니라, 오히려 껄렁하고 태도가 불량한 아이들이라는 사실에 실망감이 밀려왔다. 동시에 어쩐지 등줄기를 타고 '기싸움이 한참 되겠구나' 싶은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그 후 그들은 보건실을 자기 방처럼 드나들었다.
“여드름 패치 좀요.”
“이건 너무 적어요, 몇 개만 더요.”
“파스 하나만 더 주세요.”
“인공눈물 오늘 다 썼어요, 또 주세요.”
심지어 수업 종이 치고 나서 수업 늦게 들어온 것에 대한 핑계를 교과교사에게 대기위해
“보건실 확인증 써주세요”
라며 밀고 들어오기도 했다. 교사와의 경계, 수업과 휴식 사이의 구분 따위는 아랑곳없었다.
이 아이들은 이제부터 기싸움 경계경보 특별대상이다.
기싸움이 한참 되겠구나 싶은 불길한 예감 속에서 나온 다짐은 사실 별것은 아니었다.
경계선 지키게 하기, 단호하게 대하기, 빈틈 보이기지 않기..
파스는 1장. 인공눈물도 이름 써야 1개 지급. 여드름 패치는 다급한게 아니니 아예 없앴다.
누구든 한 명씩만 입실. 떠들지 않기. 장난치지 않기. 철저하게 단호하게.
그러자 껄렁껄렁했던 그들의 태도도 약간은 변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보건실을 편의점 드나들 듯, 보건교사는 편의점 알바를 대하듯 했지만,
약간은 내 눈치를 보았고, 태도도 조금 공손해졌다.
특히, 그 무리 중 한 남학생이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무리와 어울려 거침없이 보건실을 드나들더니, 요즘엔 혼자 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앞에서 아주 정중히 존댓말을 썼고, 보건실을 지나가면서 일부러 들러서는
“선생님 좋은 하루 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며 인사를 건넸다.
처음엔 ‘예의 바른 아이네’ 싶다가도, 수업종이 울린 직후 또다시 친구와 함께 확인증을 받으러 오는 모습을 보고는, 의도가 있다는 걸 알았다.
간을 보는 것이었다. 내 허용의 범위를 시시각각 시험하는 이런 학생들에겐 더더욱 선을 그어야 한다.
“이미 수업종이 쳤고, 교과선생님한테 허락받고 온게 아니니까 확인증은 못 써줘요. ”
그 아이는 잠깐 숨을 고르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네, 선생님. 치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 말을 남기고 문을 닫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어쩐지 약간의 전략과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빈틈이 생기면 들어가겠다’는 계산된 친근함.
그 일이 있고 난 후, 점심시간 종료 5분 전. 그 무리의 아이들이 다시 보건실로 몰려들었다.
환자들이 몰리는 시간이라 나는 “환자만 들어오세요!” 하고 큰 소리로 말한 뒤, 입술이 터져 피가 나는 한 학생을 진료의자에 앉혀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리 아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입술에서 피가나는 학생이 앉아있는 진료의자를 앞으로 밀며 키를 재려는 것이 아닌가.
진료의자 뒤쪽 벽에 키 재는 장비가 걸려 있었는데, 조금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양해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피가 흐르고 있는 사람을 앞으로 밀면서 키를 재다니!
순간,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지금 뭐 하는 거야!”
하고 크게 소리쳤고, 그제서야 상황을 인지한 아이들은 놀라 도망치듯 뛰쳐나갔다.
환자를 밀쳐내고 자기들 목적을 우선시하는 그 태도는, 나를 단순히 '물건을 주는 사람' 정도로 여기는 듯했고, 다른 환자보다 자신들이 우위에 있다는 오만함마저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이 공간을 함부로 다루게 둘 수는 없다고.
나는 알고 있다. 어떤 아이들은 교사와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누울 자리를 간보듯, 어디까지가 허용되는 선인지 실험한다.그럴수록 나는 이들과의 선을 더 단호하게 긋는다.
보건실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누구에게나 허술하지는 않다.
이 공간은 아파서 오는 아이들이 회복하고, 다시 교실로 돌아갈 수 있도록 보호받는 곳이다.
오늘도 보건실이라는 좁고 단단한 성역을 지키며, 다가오는 무례와 계산 앞에서 작은 기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아무생각 없이 다 잘해주고만 싶다. 아가들아. 인간으로서 기본은 좀 지키자. 샘 기싸움하기 너무 ...피곤하다 피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