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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말랑 Oct 20. 2020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현주의 소원은 소박했다. 남편이 일곱 시에 퇴근해서 아이들 목욕시키는 걸 거들어 줬으면 좋겠다. 여유가 된다면 좀 더 일찍 와서 저녁 준비하는 동안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주길 바랬다. 하지만 현주의 이런 기대는 매일 물거품이 된다. 남편은 아이들이 잠들고 난 후에 들어오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전쟁처럼 아이들을 씻기고 먹이고 재우고 거실로 나와보면 어질러진 장난감과 아무렇게나 엉킨 빨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 현주는 삼 형제 독박 육아 중이었다.



오늘은 너 있어서 편하겠다. 현주는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아이들 목욕시켜야겠다며 일어섰다. 뭘 도와줄까? 나도 팔을 걷어 도울 준비를 했다. 현주는 두 손으로 밀어내는 시늉을 하며 말렸다. 아니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정말 그냥 거실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줘. 아이들이 욕실로 오면 이름만 한 번씩 불러주면 돼.


아이들 이름만 불러달라고? 현주의 사정은 이러했다. 여름에는 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아이 셋을 한꺼번에 담가 놓았다. 한 명씩 데리고 나와 샤워를 시키고 세명이 샤워를 다 마칠 때까지 다시 욕조에서 놀게 했다. 날이 추워지니 한 시간씩 욕조에서 물놀이를 하게 둘 수가 없었다. 샤워기로 더운물을 펑펑 틀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공기를 따뜻하게 데워 놓는다고 해도 아이들이 감기에 걸릴까 봐 신경이 쓰였다. 아이들을 한 명씩 욕실로 데리고 들어가 목욕을 시키기 시작했다. 문제는 첫째를 목욕시키는 동안 셋째가 자꾸만 욕실로 들어왔다. 눈에 거품이 들어간다며 아우성인 아이의 머리를 감기면서 두 살짜리 막내가 비누거품과 물이 가득해 미끄러운 욕실에서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것을 살펴야 했다. 둘째를 목욕시키는 동안에는 첫째가 크레파스를 못 찾겠다며 욕실로 왔고, 셋째를 목욕시키는 동안에는 둘째가 오줌이 마렵다며 욕실 문을 두드렸다.


아들 셋 독박 육아가 힘든 것은 단순히 그 일의 버거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현주는 아이들을 씻기고 저녁을 준비하고 혼자 동동거리는 것은 모두 괜찮았다. 아이들이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뭔가 하려고 하는데 아이들이 자꾸 엉켜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짜증이 폭발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생각을 넘어 마치 온 세상이 자기를 방해하는 것같아 힘이 빠졌다. 그러니 아이들 목욕을 시키는 동안 누군가 거실에 가만히 앉아 아이들의 단순한 요구를 들어주며 욕실에 들어오지 못하게만 해도 훨씬 수월했던 것이다.



현주네 집 거실에 앉아 있는 동안 육아의 현장에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순간은 의외로 단순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종이 스티커가 찢어지지 않도록 떼어주는 일,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같이 찾아주는 일, 모르는 글자를 알려주는 일, 잘 빠지지 않는 레고를 손으로 툭 떼어주는 일,,,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단순한 일들이 아이들에게는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따라 주면 아이들은 배꼽 인사로 보답했다. 내가 없었다면 아이들은 또 수십 번씩 욕실 문을 두드렸을 일이기도 했다. 막내가 욕실로 가려하면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아이의 관심사를 돌릴 수 있었고, 아이는 욕실 안을 들여다보려던 것을 멈추고 다시 거실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덕분에 현주는 목욕시키는 아이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오늘은 진짜 빨리 끝났네. 한겨울에 땀과 물방울로 범벅이 된 얼굴로 욕실을 나오며 현주는 환하게 웃었다.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고맙다는 인사를 아이들과 현주에게 여러 번 받았다. 복잡한 생각을 접어두고 시간과 마음을 내어 아이들 옆에 머물렀을 뿐이다. 마음이 급할 때는 누군가 바로 옆에 있는 물티슈를 뽑아 건네주기만 해도 감사한 게 육아다. 성과를 내야만 인정을 받고 돈을 써야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들 사이에 앉아 있는 동안에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그저 내가 여기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믿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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