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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말랑 Oct 26. 2020

아이를 봐주고 돈을 받은 적이 없다

내게 육아 풍경의 9할은 산책이다. 아이들을 아기띠로 편안하게 업을 수 있을 때부터 시작해서, 주니지니가 유치원에 가기 전까지 2년 동안 거의 매일 아침마다 산책을 갔다. 아이들이 동네에서 돌아다닐 때 아이들 곁에는 엄마보다는 내가 더 자주 보였기에 동네 사람들 중에는 내가 이모가 아니라 엄마인 줄 아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산책이란 목적 없이 가볍게 걷는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작은 목표가 있었다. 산책을 갈 때마다 동네 카페에 가서 언니가 즐겨 마시는 커피 한 잔을 사 왔다.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는 누가 사다 주지 않으면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도 자유롭지 않다. 처음부터 커피를 사려고 갔던 건 아니다. 아침 산책길에 카페 앞을 지나다가 커피 향이 좋아서 커피 한 잔을 샀고 언니는 그 커피를 달콤하게 즐겼다. 그러다가 점점 커피 한 잔을 사기 위해 매일 산책을 가게 됐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산책을 커피 산책이라고 불렀다.


오 분이면 다녀올 동네 카페인데 아이들과 같이 가면 한 시간 반이 걸렸다.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는 것으로 커피 산책코스는 시작됐다. 공원을 지나 아슬아슬 계단길을 내려가는 연습을 하거나 큰길로 돌아가면서 타요 버스를 구경했다. 치킨집을 지날 때면 주차장에서 달리기를 하기도 했다. 자주 가는 갈빗집에 앞에 있는 작은 텃밭에 고추와 해바라기는 잘 자라고 있는지도 매일매일 확인해야 했으니 아이들은 나름대로 얼마나 분주하고 신이 났겠는가. 잘 걸어가다가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갑자기 뒤돌아서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이들이기에 아이들 손을 잡고 나선 산책길에서 언제쯤 집에 도착하리라는 걸 예상하기는 어려웠다. 조금 여유를 부리거나 카페에서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이게 되면 겨우겨우 커피 한 잔을 사고 돌아오는 데 두 시간을 넘치게 채웠다.


아침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대략 10시 반. 아이들은 옷을 갈아입고 나와 손발을 씻으며 오늘의 산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여기까지가 나와 함께 하는 산책 코스였다. 그 후에는 언니가 간식을 먹이고 양치질을 하고 낮잠을 재우면 오전이 간다. 언니 입장에서는 아이들의 오전 시간에 할 일을 채워주는 것만으로도 큰 짐을 더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이들 봐주고 얼마를 받냐고 물었고, 조금 가까운 사람들은 도대체 네 돈으로 커피까지 사면서 왜 애를 봐주는 거냐고 했다. 엄마가 아닌 사람이 아이와 시간을 보낸다면 당연히 부모에게 돈을 받아야 한다는 전제에서 시작된 질문이다. 그런데 나는 아이를 봐주고 돈을 받은 적이 없다. 언니네 아이들만이 아니라 친구들의 아이들을 한나절 봐줄 때도, 아이들을 데리고 어린이 공연을 보러 다녀온 날에도 나는 돈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친구네 집에 갈 때 케이크이나 커피, 과일들을 사 들고 갔고, 언니와 같이 점심을 먹을 때도 내가 더 많이 샀다.


나는 아이들과 가는 산책이 육아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노동이라고 생각한 적은 더더욱 없다. 나는 꼭 아이들이 아니어도 하루 두 시간 정도 산책을 했다. 그 일상 속으로 아이들을 초대했을 뿐이다. 분명 아이들을 위하고 육아를 거드는 일이었지만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아이들과 산책하면서 어지러운 생각들을 정리하고 새롭게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했다. 아이들과 발맞춰 걷는 아침산책은 모자란 나를 채우고 넘치는 나를 가다듬는 시간이었다. 건강을 위한 산책이었다면 저녁에 운동장 한 바퀴를 달리는 것이 더 운동이 되고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아침 산책은 마음을 훨씬 더 튼튼하게 해 줬다. 나는 그렇게 육아가 육아인 줄도 모르고 자연스럽게 육아에 참여하고 있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육아에 참여하려면 육아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가장 평범한 일이 되어야 한다. 누구나 아이들과 나눌 수 있는 일상이 하나씩은 있다. 주말마다 가던 도서관에 조카들을 데리고 가 보는 것도 좋겠다. 매니큐어를 같이 발라보고, 구두를 꺼내 신어보게 하는 일도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아이들과 나눌 수 있는 일상들이다. 아이들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이들은 이모 고모 삼촌들의 일상을 드나들면서 얼마나 다양한 세상을 맛볼 수 있을까.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울까. 그 사이사이에서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매여 있던 엄마 아빠들이 잠시나마 짐을 부리고 쉬어 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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