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을 설계할 때 여러 가지 조건들이 주어집니다. 건물이 지어질 공간과 시간에 설정된 법, 기술 등의 제약 조건이 있고 건축주로부터 공간의 기능, 크기와 사업예산 기준을 전달받습니다. 이렇게 주어진 조건과 그것을 반영한 결과는 일대 일 대응합니다. 이것은 마치 채점지의 배점 항목을 하나하나 만족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 반문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건축설계공모 지침으로서 배점표가 주어지는 경우가 있고, 건축가들은 수련의 과정에서 이 같은 훈련을 오랜 기간 받아왔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평가의 매트릭스를 바탕으로 작업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된 관심은 주어진 것의 반영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말 밤 명동성당에 들렀다가 성당의 서측 외벽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학생들을 보고 궁금한 것이 생겼습니다. 무엇이 학생들로 하여금 다소 밋밋해 보이는 건물 외벽을 기념촬영의 배경으로 삼도록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종탑 또는 장미창 아래나 아치같이 특징적인 부분을 두고 말입니다. 외벽을 기념의 배경으로 삼는 저 광경은 건물이 지어질 당시 주어진 조건이 아닐뿐더러예상했던 것도 아닐 것입니다.
휴대폰 카메라를 높이 들고 있는 학생은 벽돌벽 앞의 두 학생을 스테인드글라스 하단과 함께 사진에 담으려고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와 같이 사진을 찍는 세 명의 학생이 있고 나머지 둘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는 그 광경이 예뻐 보여서 셔터를 눌렀습니다. 찍고 나서 보니 제 사진 역시 건물이 배경입니다.
주어진 조건이 아님에도 공들여 만든 것. 그것으로 예측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 그 결과로 건축에 풍부함을 더하는 요소를 저는 건축의 잉여剩餘라고 생각합니다. 건축의 다의성은 이렇게 부여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