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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네 와인바 사장 Jun 30. 2019

꼭 와인잔을 써야 하나요? 물컵은 안되나요?

"꼭 와인잔을 써야 하나요? 물컵은 안되나요?"


당연히 됩니다. 안 될리가 없죠. 잔이 없으면 병나발 불어도 상관없습니다. 내 몸이 알콜을 원하는데, 잔이 없다고 못 마신다는 건 말이 안되죠. 전 옛날에 해변가에서 화이트 와인병에 빨대 꽂아서 마시면서 산책한 적도 있는데요 뭐. 하지만, 다들 와인잔을 써서 와인을 마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더 맛있게 마실 수 있으니까, 그리고 향을 더 잘 느낄수 있으니까. 여기서 좀 정확히 짚어야 할 부분이 있는데, 와인잔에 와인을 따른다고 해서 와인 자체가 더 맛있어지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와인의 분자구조나 성분이 변했다는 뜻이고, 그건 이제 연금술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부분인지라 제가 설명하기엔 좀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몇년 전 주류박람회를 갔을때, 와인잔을 올려두기만 해도 와인이 더 맛있어지고, 시간이 지나서 상한 와인도 다시 맛있어진다는 우주의 에네르기를 담은 코스터를 팔던 회사를 본 적이 있는데, 그 회사 아직 장사(라고 쓰고 ‘사기’라고 읽습니다) 잘 하고 있는지 좀 궁금하네요.


하여간. 제가 생각하는 ‘와인잔에 와인을 마실 때의 좋은 점’을 몇가지 추려 봤습니다.


첫번째, 투명하다. 앞에서 와인의 색을 어떻게 봐야하는지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불투명한 잔이라면 애초에 색을 보는 것이 불가능하겠죠. 예쁘게 나온 잔들 중에는 색유리로 만든 잔들도 있는데, 와인잔으로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투명한게 제일 좋아요.


두번째, 잔이 얇다. 대부분의 와인잔은 얇고 잘 깨집니다. 잔이 비싸고 좋을 수록 더 얇고 더 잘 깨집니다. 게다가, 깨지면 날카롭게 깨져서 위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얇게 만드는 이유가 뭘까요? 이유는 입술에 느껴지는 감촉 때문입니다. 두꺼운 물컵에 입술을 대는 것과, 얇은 잔에 입술을 대는 것은 느낌이 상당히 다릅니다. 잔이 얇을수록 입술에 자극이 덜 하고, 그래서 와인에 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정말 정말 얇은 잔에 와인을 마시면, 공중에 떠있는 와인이 입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요. (약간 과장하자면 그렇다는 소리입니다.) 이렇게 얇은 잔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어떻게 보자면 약간 변태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전에 탄닌의 느낌을 설명할 때 실크같은 느낌이 드는 와인이 좋은 와인이라는 말을 했었는데, 촉감을 극대화 시킨다는 점에 있어서(와인잔의 경우에는 불필요한 촉감을 제거한다고 봐야겠죠) 같은 맥락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 오목하게 생겼다. 오목하게 생긴 이유는 향을 모으기 위해서 입니다. 향은 와인에서 매우매우 중요한 부분이니까요. 오목한 모양의 잔이 향을 잔 안에 가둬두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향을 좀더 편하고 진하게 맡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잔 자체의 크기가 크기 때문에, 잔에 코를 박으면 주변의 다른 향들을 차단해 주는 효과도 있어요. 옆자리에 향수 뿌린 땀내나는 사람이 앉아 있어도, 와인잔이 있다면 와인향에 집중하는 것이 가능한거죠. 가끔 서양사람들이 와인 마시는 사진을 보면, 커다란 코를 와인잔에 집어 넣고 향을 맡는 사진을 볼 수 있는데, 코로 와인을 마셔버릴 것만 같은 장면을 보면서 코가 큰게 부럽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네번째, 술이 넓게 펴진다. 와인잔은 크기가 꽤 큽니다. 그리고 비싸고 좋은 잔 일수록 더 크고 넓어집니다. 그리고 그런 잔에 와인을 담으면 바닥에 넓게 펴지면서 담기게 됩니다. 그렇게되면 공기와 만나는 면적이 더 넓어지고, 와인의 향이 더 많이 공기중으로 뿜어져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덕분에 우리는 향을 더 잘 맡을 수 있게 되죠. 요즘 인기있는 와인잔인 Zalto 잔 같은 경우는, 아예 대놓고 아래부분이 넓게 펴지는 디자인으로 제작이 됩니다. 조금만 와인을 부어도 넓은 면적이 공기와 닿게 돼요. 게다가 Zalto Bourgogne잔은 크기도 어마어마해서, 750ml 와인 1병이 한번에 담기고도 남는 용량입니다. 비싼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죠.

(좌) Zalto Universal (우) Zalto Burgundy


그리고 다섯번째, 냄새가 안 난다. 와인잔으로 쓰기에 최악의 잔이 뭘까요? 전 종이컵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종이의 냄새를 풍기고, 시간이 흘러서 와인에 젖게 되면 그 뒤로는 젖은 종이 냄새를 풍기기 시작하니까요. 히노키 나무로 만든 잔도 같은 맥락에서 별로일거구요. 쇠냄새가 나는 주석잔도 좋은 선택은 아닐 겁니다. 재질에 따라서는 프라스틱 잔도 특유의 냄새가 날때가 있죠. 그냥 하여간에 뭔가 냄새를 풍기는 잔은 다 별로입니다. (그런면에서 보자면 머그잔은 집에서 대충 먹기에 최고의 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손잡이도 있어요! 물론, 제 생각입니다.) 누누히 말하지만 향은 와인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니까요. 하지만 유리는? 다행히도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설거지할 때 사용한 세제를 제대로 헹궈내기만 했다면 말이죠. 옛날에 어떤 손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기해. 이 집은 와인잔에서 세제 냄새가 하나도 안 나. 다른 집 가보면 세제 냄새 올라올 때 많거든.”

우리집에서 세제냄새가 안 나는 이유는 두가지. 첫번째는, 세제를 비싼걸 씁니다. 두번째는, 알바생이 열심히 헹굽니다. 역시 돈과 노동력을 갈아 넣으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와인잔이 좋다고 지금까지 열심히 떠들었는데, 지금 제 옆에는 와인이 담긴 머그컵이 놓여 있습니다. 퇴근하고 집에서 이 글을 쓰는 중이거든요. 가게에서 지겹도록 설거지 했는데, 집에서까지 와인잔을 닦고 싶지는 않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이기는 것. 그것은 “귀찮음”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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