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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장하드에서 꺼낸 봄날의 베르겐

역병에 발이 묶여버린 여행자가 찾아낸 동결건조 봄

by 이우석 더 프리맨

여행의 발이 꽁꽁 묶여 미처 봄을 보지 못했다.
서랍(사실은 외장스토리지)에서 그간의 봄을 몇 개 골라 살펴봤다. 순간 기억 속 동결건조된 봄의 흔적이 단번에 되살아나는 기분이다.

몇 년 전 다녀온 북국 노르웨이의 봄을 전편에 이어 끄적여본다.

노르웨이에 몇 번 다녀왔더니 이제 노르웨이인들이 구분간다. 남유럽과는 확연히 다르고 프랑스 벨기에 인들과도 또 다르다.

노르웨이 남성의 경우, 대개 대머리이거나 지금 탈모가 현저히 진행되고 있는 중일 것이다. 이중 키가 큰 사람과 조금 작은 사람으로 구분된다.

여성의 경우, 통닭 포장지에 가까운 금발 머리에 '단팥빵'만한 얼굴, 그리고 큰 엉덩이와 긴 다리를 지녔다.

젊은이들은 춤을 좋아하지만 수줍음이 타는 편으로 보인다. 규칙을 잘 지키며 패션의 룰은 지키지 않는다. 소득 수준은 세계 최고지만, 그보다 훨씬 가난한 국가 사람들보다 멋부리는데 돈을 쓰지 않아보인다.

하지만 그들보다 순수한 눈빛을 가졌고 실제 치안 상황도 훨씬 좋다.

저녁이면 집에 들어가 꽁꽁 숨든지 아니면 남자들이 나와 바에서 축구를 보기 위해 맛없는 로컬 맥주를 한잔에 2만 원이나 주고 마신다. 여자들은 보기에도 힘겨울 만큼 찰싹 달라붙는 바지를 입고 나와 종일 걷거나 뛴다.

커플 역시 축구를 보거나 짠 음식을 먹는다. 노르웨이식 여가선용이다.

'피요르fiord의 수도'라 불리는 베르겐으로 이동하기 위해 오슬로 공항으로 향했다. 예약한 로컬 항공사는 '노르웨이지언 닷컴'이다.

티켓에도 동체에도 그렇게 적혀있다. 인터넷 쇼핑몰이나 포털사이트 업체 같은 이름이다.

예상이 맞다면 이 항공기에는 아마도 '제트엔진'이 아닌 '검색엔진'을 사용할 게 분명하다.

이 유머러스한 이름을 가진 항공사의 CEO는 자사 디자이너에게 우스꽝스럽게도 항공기의 앞부분만 빨간색으로 칠하는 디자인을 맡겼다.

그래서 비행기를 보면 마치 '콘택600' 캡슐, 혹은 지장을 찍고 인주를 덜 닦은 손가락처럼 보인다.

비행시간은 1시간 남짓. 베르겐 공항에 도착했다. 노르웨이에서 2번째로 큰 도시라고는 하지만 인구는 얼마되지 않는다.

명성(베르겐은 북유럽 최초의 물류항이다.)에 비해 공항이 북적이지 않아서 좋았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베르겐 시는 외국인들에게 공항이 혼잡해 보이길 원했나보다.
캐리어를 끌면 큰소리가 나도록 고안된 특수한 보도를 공항 주변에 깔았다.

도심 길도 상황이 그렇다. 북유럽인들이 '스토케'처럼 바퀴가 큰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오슬로 천도 이전까지 수도였던 베르겐은 그 유명한 14~16세기 한자동맹으로 유명해진 도시다.

본의 아니게 유럽 역사의 중심에서 비껴난 북유럽과, 장사를 통해 큰돈을 벌고 싶었던 독일인들이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쪽 항구인 베르겐을 북유럽 최대 물류 무역도시로 만들고자 했다.

독일 상인들은 피오르에 큰 배가 들어올 수 있는 커다란 부두를 개설하고 상품(그래봤자 말린 대구포 정도였겠지만)을 적재 유통하는 창고를 임차한 땅에다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브리겐Bryggen'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브리겐은 부두 앞에 길게 놓인 뾰족한 지붕이 이어진 건물군으로, 요새로 따지면 물류 센터다.

부둣가에 남겨진 10여 채의 건물들이 아주 멋지다. 뒷편으로 가면 당시 실제 사용하던 창고와 도르레 시설 등이 남아있지만 내부는 화가나 공예가, 디자이너, 커피 바리스타 등이 숍으로 이용하고 있다.

사실 처음 지은 것들은 17세기에 일어난 대화재로 모두 타버렸는데, 새로 지을 때도 원래 모습과 옛날 제재 방식 그대로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브리겐 맞은 편 부둣가 어시장은 현대적이다. 생선 비린내가 진동하던 낡은 생선창고와 상설시장 건물을 리노베이션해서 지금은 멋진 통유리와 금속빔으로 만든 현대식 건물로 재건했다.(물론 비린내가 전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곳에선 구경 뿐 아니라 아주 맛있는 노르웨이 전통 음식을 즐길 수 있다. 대구와 홍합, 그리고 치즈를 넣고 끓인 피시 스프는 고소한 맛이 일품인데 굉장히 뜨겁다.
재료로 쓰인 물고기들이 마지막 복수라도 하듯 뜨거운 화기를 뿜어 혀를 데게끔 만든다.
이것이 '노르웨이의 슾soup'이다.

피시케이크는 정말이지 감동할만큼 맛있다. 어묵맛과 거의 비슷한데 맛으로 따지자면 일본 가고시마의 명물 '가마보코'보다 훨씬 낫다.

쫄깃하고 진한 맛을 낸다. 셰프의 실수였는지, 유일하게 짜지 않아 기억에 단단히 남았다.

어시장 2층은 시립 관광안내소다. 사람이 별로 없어 은근히 뒷통수에 꽂히는 시선이 신경 쓰인다.

자신에게 질문하기만을 기대하는 여성 안내원이 3명이나 앉아있는데 모두 장대처럼 키가 커서 무슨 레이더처럼 내 동선을 따라 고개가 돌아간다.

그나마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 같아 관광책자를 챙겼다. 가져오면 꼭 후회하고야 마는 무거운 책자들(그것도 노르웨이어 판)이다.

어디서 버릴까를 고민하다 결국 호텔까지 들고왔다. 베르겐을 떠나는 날, 호텔 서랍에 두고 나왔는데 나중에 보니 분실물이라며 한국으로 보내준다는 이메일을 여덟 통을 보냈다.

청정 자연지대인 노르웨이에선 여러 원색조 컬러를 만날 수 있다.

가끔이지만 새파란 하늘과 푸른 숲, 붉은 지붕을 가진 연두색 목조 건물, 그리고 고흐의 해바라기를 닮은 샛노란색 포크레인이다. 베르겐 시내 역시 공사가 한창이다.

시내는 모두 총천연색 건물이 이어져 마치 에버랜드에 온 듯하다. 아!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는 비용은 에버랜드가 훨씬 저렴하다.

시내 모습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은 전망대. 홍콩의 피크트램과 비슷한 플뢰이바넨Flфbanen을 타야 전망대를 오를 수 있다. 가파른 산비탈을 꼭 5분 정도 올라가는데 왕복 요금은 80크로네(1만6000원)나 되는 탓에, 올라가는 동안 승객들은 모두 놀란 눈을 하고 있다.

베르겐 피요르의 멋진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는 기념품 가게 하나와 전통 식당이 있다.
이곳에서 또다시 생선요리와 감자로 식사를 했다. 노르웨이에선 줄곧 생선요리다.

식당에는 노인들이 많다. 이 넓은 식당에서 내가 가장 젊은 축에 속한다. 생각해보니 오슬로에서도 그랬다.

이 나라 역시 노령화 사회인건지, 아니면 젊은이들이 퇴근 후 한잔 2만원 짜리 맥주를 사 마시기 위해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있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이우석 놀고먹기연구소장>

한자동맹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한 베르겐의 브리겐.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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