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석의 푸드로지] 장마철 휴가철 전 한장 부쳐먹기
비가 올 때나 놀러가서나 생각나는 음식, 전(煎).
전은 한국의 대표적 요리 중 하나다. 격식있는 어느 상에도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전이다.
특히 전국 어느 지역에서나 공통되는 몇 안되는 잔치, 명절 요리로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다.
밀가루와 기름 귀하던 시절 고급요리였던 전은 이제 상식하는 반찬 및 안줏거리가 됐다.
외국에서도 인기가 좋은 한식요리로 영어권에선 Assorted Korean Pancake(한국식 팬케이크 통칭), 일본에선 아예 강원권과 영남권 방언인 지지미(チジミ)로 부른다.
전유어(煎油魚), 전유화(煎油花), 저냐 등으로 불리는 전은 조리법(지지다 煎)까지 포괄적 의미를 이름에 담고 있다. 식재료에 기름을 두르고 번철에 지져낸(부쳐낸) 음식 종류를 총칭한다. 이탈리아인들이 피자를 말하는 것처럼 ‘모든 식재료는 전이 될 수 있다’할만큼 재료는 다양하다.
생선(건어물 포함), 해물, 육류(고기와 내장), 채소, 두부, 통조림, 곡물, 심지어 꽃 등 모두가 전의 형태로 재탄생할 수 있다. 그래서 고기를 다른 재료와 함께 꿰어 불에 구운 산적(散炙)도 전에 포함된다. 고기만 구워낸 적(炙)과는 다르다.(경상도에선 전을 적이라 부른다)
전의 종류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그만큼 한국인에게 입맛이 짝 들어맞는다는 얘기다.
막걸리 한 사발에 김치전 한 장이 대학생들이나 서민의 외식거리가 됐으니, 전이란 음식팔자도 참 유전(流轉)이 심하다.
기름기 생각나게 하는 장마철에 놀러가서 번철 펴기 좋은 휴가철, 전국 유명한 전집 소개로 전 한판을 들들 부쳐봤다. 마침 요즘 대파도 좋고 배추도 애호박도 맛이 들었을 때다.
●‘토박이 명소’ 나들목 빈대떡
서울 변두리 주택가였던 망원동이 핫한 ‘망리단길’이 됐다. 그 중심에는 여러 유명 가게들이 있지만 일명 ‘망원동 전집’도 한 자리 차지한다. 그냥 막무가내로 망원동 전집하면 모른다. 하지만 토박이들은 잘 안다. 이름은 나들목 빈대떡이다. 원래 한 동네 오랫동안 살아온 이들은 상호로 잘 안부르게 마련이다.
커다란 번철을 놓고 주문을 받으면 수시로 부쳐낸다. 빈대떡이며 김치전, 돈저냐(동그랑땡) 등 안줏거리로 딱인 것들을 당장 부쳐준다.
모둠전을 주문하면 동태전, 고추전, 깻잎전, 부추전, 애호박전, 돈저냐 등을 한가득 내준다. 분홍색 옛날 소시지 전도 판다. 젊은 층은 “그게 뭔 맛이냐”할지 모르지만 중장년들은 좋아한다. 예전에는 꽤 귀한 고급 도시락 반찬이었다. 그걸 접시 채 내준다. 덕분에 소주 한잔 털어넣고 추억 한입 베어문다.
정말 해물이 가득한 해물파전도 잘 나간다. 향긋한 쪽파 사이에 오징어와 조개가 많이 들어 든든하다. 값도 헐하다. 두부부침은 4000원부터 시작한다. 코다리찜, 오징어초무침 등 안줏거리도 많다. 국물 삼아 먹는 라면도 추가 술 한병을 부른다.
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로 33 모둠전 1만7000원. 소시지전 6000원.
●‘식기 전에 언능 드씨오’ 육전명가 육전
원래 전은 관혼상제 잔치에 쓸만큼 귀한 음식이다. 이중 가장 사치스러운 전을 맛보려면 광주를 가면된다. 광주광역시의 명물 중 하나가 소고기 전 즉 육전(肉煎)이다.
식재료도 그렇고 조리도 굉장히 호사스럽다. 요리를 주문하면 한복을 입은 직원이 쿠커를 들고 등장한다. 테이블 옆에 두고 앉아 직접 일일이 하나씩 계란옷을 입히고 구워, 젓가락으로 개인 접시에 덜어주는 방식이다.
식도락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 고로 씨가 봤으면 혼잣말을 열 번이라도 되뇌었을 방식이다.
육전을 맛보면 ‘전은 금방 부쳤을 때가 가장 맛있다’는 것을 대번에 알게 된다. 식으면 맛이 없어지는 것은 대부분의 음식(심지어 냉면마저도)에 해당되는 얘기겠지만 전은 정말 그렇다.
입에 넣었을 때 뜨거워서 뱉을까 말까 고민할 정도가 가장 맛있는 온도다.
상무지구 육전명가는 육전 전문식당이다. 그렇다고 꼭 고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키조개 관자, 낙지, 홍어, 맛조개 등을 낸다. 몇점 먹다가 지루하면 깻잎장아찌에 싸서 먹으면 다시 몇 인분이고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반찬도 잘한다.
광주 서구 상무자유로 174 육전 2만7000원. 홍어전 2만6000원.
●‘광주만 있는게 아이라쿠대’ 진주육전 하연옥
기생집으로 대변되는 조선 외식문화의 중심지 진주. 냉면과 비빔밥 등 음식문화가 발달했다. 진주 냉면에 꼭 들어가는 것이 바로 육전이다. 전을 부쳐 국물에 넣는 것은 원래 전 자체가 또다시 다른 음식의 중요 식재료가 되기 때문인데, 여기선 시원한 냉면 고명으로 올린다는 점이 다르다.
수육을 올리는 것보다 훨씬 손이 많이 간다. 한양이나 개성처럼 권력형 외식문화였던 까닭이다.
진주냉면 명가로 꼽히는 하연옥, 이 곳에서 냉면에 육전 한 접시는 하나의 세트처럼 인식된다. 육전 소고기는 진한 육향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빈틈없이 노릇한 계란옷을 차려입고 접시 위에서 기다린다. 뜨거운 육전 한점은 시원한 냉면국물과도 딱 어울린다.
경남 진주시 진주대로 1317-20 한우육전 1만9500원
●‘동부부침 들어봤슈?’ 동부콩 빈대떡
충주 땅에선 보기드문 평양냉면집이 있다. 시내 중앙시장 인근 삼정면옥은 슴슴하고 구수한 국물에 메밀향 진한 국수를 말아내는 집으로 유명하다. 40년 넘게 영업해온 노포다. 쇠고기를 삶아 뭉텅뭉텅 썰고, 중국식 냉채처럼 채소와 겨자 양념에 무쳐내는 수육도 맛이 좋다.
근데 이집 별미는 따로 있다. 동부부침. 동부콩을 갈아 반죽 후 번철에 지져낸 빈대떡 방식인데 녹두와 또 다르다. 밀가루가 아닌 단백질을 많이 함유한 콩으로 부쳐낸 전이라 처음 베어물 때 느낌이 바삭한 것이 꼭 고기파이처럼 느껴진다. 비계 기름을 두르고 부쳤을라나. 속에는 푸성귀만 들었지만 입에 넣으면 고소한 단백질 맛이 한가득 퍼진다.
충북 충주시 관아3길 21 동부부침 4000원.
●‘몇번 먹어봐야 아는 맛’ 대구 방천찌짐 배추전
지역 출신이 아니면 잘 모르는 맛의 세계. 바로 배추전이다. 배추 이파리를 펴서 번철에 얹고 묽은 반죽을 부어 지져내는 배추전. 경상북도와 강원권에서 주로 먹는 전이다.
재료라고는 달랑 배추 한닢과 멀건 밀가루 풀 뿐이다. 이 맛을 두고 수도권이나 호남에선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라고 한다. 사실 영남에서도 처음 먹자면 뭔가 빠진 섭섭한 맛으로 느낀다. 하지만 배추전은 그 무미(無味)로 먹는 음식이다.
나이가 들고 자주 접하다 보면 배추의 달달하고 시원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대구 김광석길로 유명한 방천시장에 조그마한 전집이 하나 있다. 이름하여 방천찌짐. ‘찌짐(전)’을 주로 파는 막걸리집이다. 이 집에서 ‘정통 대구식’ 배추전과 부추전을 판다. 물론 해물파전과 동태전도 있다. 반들반들한 번철에 기름을 두르고 배추전을 즉석에서 부쳐낸다. 금방이다. 숨만 죽으면 바로 맛볼 수 있다. 부드럽고 시원한 맛의 배추전에 참기름향 고소한 양념장을 찍어 먹으면 그 맛이 기막히다. 정구지라 부르는 부추전도 밀가루는 거의 없다. 빽빽한 부추의 모양만 잡아준다. 이게 바로 대구식 적(전)이다.
대구 중구 달구벌대로446길 3. 배추전 부추전 각 3500원.
●‘명태전의 신개념’ 부림시장 명태전
우리가 아는 명태전은 명태살을 발라 한입 크기로 부쳐낸 것이다. 가시가 있고 없고, 밑간을 하고 안하고 정도지 어딜 가나 대부분 그렇다.
하지만 창원 마산부림시장 앞 명태전은 개념이 다르다. 명태 한 마리를 펴서 통째로 부쳐내는 방식이다. 기름을 두른 번철 위에 명태 옆을 잘라 반으로 갈라 펴고 밀가루풀과 매운 고추, 방아잎(배초향), 부추 등으로 양념을 바르듯 옷을 입힌다.
껍질까지 바삭하게 익으면 다시 뒤집어 지져내는데 이 맛이 별미다. 마지막 먹기 편한 크기로 잘라서 내주면 한입에 쏙 넣고 우물우물 씹기만 하면 된다.
매콤한 양념이 바삭하고 부드러운 명태살과 함께 잘도 어우러진다. 몸통부터 꼬리까지 각각 다른 맛을 낸다. 부추전도 맛이 좋아 많이들 찾는다. 625떡볶이 옆에 있다.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3·15대로 352 명태전 1만원
●‘고기를 사랑한 파전’ 부민옥 파전
전과 어울리는 재료 중 파(蔥)가 있다. 쪽파든 대파든 상관없다. 기름기의 느끼함을 없애주기 때문이다. 유명한 동래파전 역시 파에 찹쌀가루 반죽을 뿌려 익힌다. 파전하면 보통 해물전이다. 대부분 ‘해물파전’의 이름으로 판다. 오징어와 조개 등 해물과 파의 궁합도 좋다.
한식 메뉴 중 많은 것을 파는 부민옥의 경우 파전에 큼지막한 대파와 고기가 들었다. 거의 육전(肉煎)이라 해도 될 만큼 소고기를 많이 다져 넣었다. 어떨 때는 대파랑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어 육전과 파전을 동시에 반반 시킨 것처럼 즐길 수 있다.
해물이 없어도 대파는 고기와 기름맛을 향기로 보(報)한다.
혹자는 부민옥 파전을 ‘숨은 메뉴’라 하는데 아무도 숨긴 적은 없다. 메뉴에도 당당하게 적혀있다. 메뉴 중엔 모둠전도 있다. 이것 역시 숨은 적은 없다.
서울 중구 다동길 24-12 모둠전 파전 각 2만3000원
<놀고먹기연구소>
에필로그
정말이지 전의 세계는 놀랍다. 안쓰는 것이 없다. 전 중 제일이라는 민어부터 각종 해산물에 소고기, 간, 처녑 등 내장에다 스팸, 소시지, 참치 등 통조림 등 모든 것이 전으로 조리할 수 있다. 고수풀이나 방아잎으로 전을 부치는 경우도 있다. 전주에는 도토리를 갈아 부친 전을 파는 곳(전주 덕진구 아중도토리묵촌)도 있다.
일반적으로 분류되는 감자전도 감자만 갈아서 쓰는 집, 밀가루를 섞는 집, 감자채를 썰어 다시 부치는 집 등 다양하게 맛볼 수 있다.
특히 얇게 채를 썰어 부치면 바삭함이 더하다. 섬유처럼 서로 얽힌 감자전에 기름과 불 기운이 고루 스며 더욱 식감을 좋다. 좀더 바삭한 맛을 강조한 뢰스티(rösti 스위스 요리)라 생각하면 된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 ‘차림’에서 이같은 감자전을 맛볼 수 있다.
전(煎)은 부치는 것이고, ‘떡’을 뜻하는 병(餠)은 찌는 것인데 전병(煎餠)은 ‘부친 떡’이 된다. 보통 안에 김치나 팥 등 소를 넣는 경우가 많다. 예외로 일본의 센베(煎餠)는 같은 한자를 쓰지만 구운 과자다.
빈대떡(貧者餠)은 이름에 떡이 들어가지만 조리법 상 ‘전’의 범주에 든다. 진달래 등 꽃을 올리고 지지는 화전(花煎)은 모양새가 떡과 비슷하지만 기름에 지져 구우니 역시 전에 속한다.
전의 세계는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넓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