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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들레는 민들레 Aug 05. 2024

나에게  아르바이트란

 배움의 장이다.

나에게 아르바이트란 책이나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삶의 지혜를 배우는 배움의 장이다.

   

국민학교 때 4학년 때 처음으로 땅콩 따기 아르바이트를 했다. 땅콩 농사를 짓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불러 모아 땅콩을 따주면 돈을 주겠다고 했다.  아이들은 그 말에 홀려 동네 공터에서 땅콩밭으로 놀이 공간을 바꾸었다. 아이들은 땅콩을 따면서 누가 빨리 따는지 시합하고 다 함께 유행가를 노동요처럼 부르기도 했다. 말하기 좋아하는 어른들은 어려서 풀죽을 먹었다, 호랑이를 봤다, 군대에서 얼음물에 목욕했다, 세상 참 좋아졌다, 어디에 다리가 생기기 전에는 나룻배를 탔다는 등의 옛날꼰날  이야기를 했다. 아이들은 그 이야기가 믿기지 않아 "정말요?"라고 묻곤 했다. 난 속으로 풀죽은 어떤 맛일까?, 나룻배를 타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등을 상상했었다. 남자아이들은 땅콩 아르바이트로  받은 일당을 모아 오락실로 갔다. 서로 돈을 꾸고 빌려주면서 오락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금전거래는 항상 다툼을 불러일으킨다. 남자아이들의 다툼을 학교로 가지고 와 선생님이 해결해 주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선생님들은 남자아이들이 하도 많이 터미널 옆 오락실에 들락날락 거려 종종 불시점검을 다녔다. 그때 걸린 남자아이들은 반마다 돌아다니며 ‘오락실에 가지 맙시다. 친구에게 돈을 빌리지 맙시다.’라고 외치고 다니며, 쪽이란 쪽은 다 당해야만 했다. 여자아이들은 코 묻은 돈을 가지고 '아름드리'라는 잡화점에 가서 어린이용 핸드백을 샀다.  잠을 잘 때도 핸드백을 메고 잤다. 그 당시 아파트 사는 여자애들이 한참 핸드백을 대각선으로 메고 다녔었다. 아파트에 살지 않는 여자 아이들은 핸드백을 사고 싶어도 부모님께 말하지 못했다. 그때는 학교에서 사 오라는 것 이외의 돈을 부모님께 받아서는 안 되는 일인 줄로만 알았다. 아르바이트에서 받은 일당은 그렇게 우리의 결핍된 욕구를 채워주었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노동하고 돈을 벌어 내 맘대로 사고 싶은 걸 사는 기쁨을 렸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담뱃잎 엮는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담배밭에서 담뱃잎을 따서 경운기까지 나르고 어른들이 담배를 동네 뒷산에 내려놓으면 아이들이 담배를 크기별로 분류하고, 담뱃잎 20개 정도를 새끼줄이나 노끈으로 엮었다. 담뱃잎 엮기 아르바이트는 나무 그늘에서 했기에 편했다.  담뱃잎 냄새와 담뱃잎에서 나오는 끈적끈적 액이 손에 묻는 것이 좀 싫기는 했지만 돈 버는 즐거움이 컸기에 충분히 견딜만했다.  담뱃잎을 엮어 얼마를 받았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담뱃잎은 엮은 수만큼 돈을  받았다. 담뱃잎을 엮을 때는 언제나 술참으로 국수와 간장이 준비되어 있었. 일하고 여럿이 먹는 국수는 참 맛있었다. 지금은 국수를 먹어도 절대 그때 그 맛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노동, 나무 그늘, 친구, 어른, 시원한 바람의 어울림이 없어서일 것이다. 노동할 때는 일 뿐만 아니라 함께하는 동료나 노동의 강도 또는 복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아르바이트였다.


중학교 때는 고추밭에서 고추 따기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내가 시골에서 했던 아르바이트 중 가장 힘든 것이었다. 고추 따기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주의할 점이 있다. 완전히 익은 빨간 고추만 따야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푸르스름한 고추를 따면 바로 그 자리에서 잘린다. 국민학교시기 우리 집 고추를 딸 때는 일부러 푸르스름한 고추를 땄다. 아부지는 "이놈의 가시내, 푸르스름한 고추를 다 땄네. 안 되겠다. 너는 집에 가서 동생들이나 봐라."라고 하셨다. 그럼 나는 좋아서 집으로 가곤 했다. 하루 종일 고추를 딸 때는 점심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고추밭주인이 집에서 밥을 맛나게 해 온다. 반찬은 김치하고 생선조림 등이 주를 이루었고 고추밭에서 시퍼런 고추를 따서 된짱에 찍어 먹었다. 고추밭에 참외나 수박, 토마토를 심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술참으로는 그런 것들을 먹었다. 어른들은 술을 마시기도 했다. 인심 좋은 고추밭주인은 동네 점방에서 간식으로 쭈쭈바나 하드를 사 와서 주기도 했다. 뜨거운 햇빛 아래 살갗이 타들어 갈 것 같았던 고추 따기는 너무 힘들었다. 나중에는 아이들이 돈을 포기하고 동네에서 또는 집에서 노는 것을 택하게 만들었다. 나도 자발적으로 그만두었다. 누군가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땡볕에 종일 쪼그려 앉아서 고추 따는 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때는 내가 어른이 되면 고추 따는 기계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들고 다니는 전화기나 사서 먹는 물이나 공기등에 대한 상상은 현실이 되었지만 아직도 고추 따는 기계는 내 상상 속에만 존재해서 아쉽기도 하다.

   

수능 끝나고는 시장에서 옷가게를 하는 친구 삼촌 가게에서 일주일 정도 아르바이트를 했다. 출근하자마자 옷가게 근처 아파트에 가서 전단지를 경비원 몰래 우편함에 넣고,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2시간 정도 돌린 후 가게에서 옷을 파는 일이었다.  가게가 파리를 날렸기에 전단지 돌리고 남은 대부분의 시간을 멍 때리며 지냈고 괜히 친구 삼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장사가 안된다는 이유로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잘렸다. 이 아르바이트는 가 했던 모든 아르바이트 중 제일 편한 아르바이트였고, 유일하게 해고된 알바였기에 아직도 아쉬움이 남는다. 


대학교 때는 간호학과였기에 할 공부가 많았다. 아르바이트하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나는 장학금을 받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생각해서 학기 중에는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았다. 다만 돈이 정말 필요할 경우에만 주말에 인력지원센터에 가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받았다. 식당에서 설거지하고 음식 나르기, 마트에서 농산물이나 선물세트 팔기를 했다. 단기 아르바이트로는 꽤 괜찮았다.


대학고 1, 2학년 방학 때는 시골병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환자들 바이탈 재고 침상 정리하는 일, 약국에서 간호사실로 약 가져다주는 일, 환자 검체를 임상병리실에 가져다주는 일, 환자들 모시고 방사선실 가는 일, 환자 수술실로 옮기는 일 등이 주를 이루었다. 이 아르바이트는 시골병원에 무작정 전화해서 간호학과 학생이라고 말하고 아르바이트할 수 있냐고 물어서 얻은 알바자리였다. 군 소재지에 있는 아르바이트 자리였기에 나는 병원 빈 병실에서 숙식을 했었다. 간호사들이 후배라고 병원생활의 노하우를 알려주시고 했다. 나처럼 아르바이트를 하는 간호대생들이 두어 명 있어서 서로 친하게 지냈었다. 병원 아르바이트는 힘들었지만 방학 내내 일했기에 돈을 꽤 받았다. 방학 때 받았던 이 아르바이트비를 아껴서 한 학기 동안 썼다. 이 아르바이트간호사들이 하는 일들을 옆에서 지켜볼 수도 있었다. 또 환자들이 앓고 있는 병들에 대해 나름대로 공부할 수 있어서 좋았다.


보건교사가 되고 강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보건교사를 대상으로 ‘스토리텔링 보건수업’,  ‘학교에서의 당뇨환아 관리의 실제’에 대해 학교 현장에서 내가 터득한 방법을 동료교사들과 나누는 것이었딘. 강의를 준비할 때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만, 강의 후 열광하는 동료 보건교사를 보면서 함께 나눌 수 있어 기뻤다. 앞으로도 학교 현장에서 배우고 고민했던 것들을 다른 보건교사들과 나누는 아르바이트를 더 해보고 싶다.     


경제적으로 그리 절박한 상황에 놓이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아르바이트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그러나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르바이트를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르바이트는 노동하고 돈을 버는 즐거움을 넘어 책이나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새로운 배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르바아트 자리가 있다면 도전해라. 배움의 장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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