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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노래가 흐르던 순간

2025.6.6 (금)

by 시니어더크


"현충일, 조기 아래 흐르던 노래 한 곡이 그리움의 문을 열었습니다.

풀잎 위 햇살처럼 스며든 정숙 씨의 얼굴을 떠올리며,

오늘도 마음으로 손을 뻗습니다."


현충일 아침, 서랍 속에 오랫동안 넣어 두었던 태극기를 꺼냈다.

손에 쥐는 순간, 국기에서 오래된 시간의 냄새가 났다.

살짝 구겨진 천을 펴서 조기로 발코니에 달았다.


조용한 바람에 가만히 흔들리는 태극기를 바라보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국기를 달았던 게 언제였지?'

그마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동안은 살기 바빠서,

기념일마다 무언가를 챙긴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병원에 다니고, 약을 챙기고, 일상 하나하나를 감당하느라

국기를 달지도 못했던 것이다.

국기를 단다는 건,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기리는 이 날,

정숙 씨의 삶도 함께 떠올랐다.


고통 속에서도 언제나 단정했던 태도,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던 따뜻한 마음,

아프면서도 늘 밝게 웃던 그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뚜렷하게 떠올랐다.


그래서 태극기를 달면서

그 녀의 삶도 마음속 깊이 기렸다.

살아온 모습 그대로가

충실하고 아름다웠다는 걸 새삼 느꼈다.


TV를 켜니 현충일 추념식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숙연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 가운데 소프라노 이해원이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노래가 시작되었다.


'보고 싶은 얼굴'이라는 곡이었다.

"풀잎만 보아도 보고 싶은 너의 얼굴

아련한 추억으로…"

노래가 흐르기 시작하자

가슴속에 꼭꼭 눌러 두었던 그리움이 터져 나왔다.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그 순간만큼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해원의 맑고 고운 목소리가

정숙 씨를 부르는 듯 들렸다.


노랫말 하나하나가 마음을 두드렸고,

쏟아지는 눈물을 어떻게 막을 수가 없었다.

그 노래는 단순한 추모곡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조용히 안아주는 노래였다.


그 속에 아내가 있었다.

내가 너무도 보고 싶어 하는 얼굴이

그 노래 안에 있었다.


노래가 끝난 후에도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TV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흔들리는 조기 너머의 하늘이

낯설 만큼 멀고 깊게 느껴졌다.


점심 무렵, 쿠키와 함께 산책을 나섰다.

쿠키는 언제나처럼 풀잎을 찾아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한참을 그러다 풀숲에 코를 묻고 멈춰 선 쿠키를 보며

나도 함께 멈췄다.


고개를 숙이고 풀잎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반짝이던 그 잎 위에서

문득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없이 다정하고, 조용히 웃고 있던 그 모습이

풀잎 사이로 스며들듯 다가왔다.


함께 걷던 골목길,

작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마시던 커피,

시장에서 장을 보며 나눴던 대화들.

그 모든 풍경 속에 아내가 있었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어디에나 남아 있었다.

지금 정숙 씨는 어디쯤에 있을까.

이 바람을 따라 하늘 저편 어딘가에서

조용히 나를 지켜보고 있을까.


오늘 같은 날,

그 노래를 듣고 나처럼 눈물 흘리며

함께 기억하고 있을까.


눈을 감았다.

가슴속에서 선명하게 떠오르는 얼굴.

슬프도록 따뜻한 미소.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 같은 눈빛.


보고 싶다, 정숙 씨.

참 많이, 보고 싶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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