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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가 익어가는 계절에

2025.6.7 (토)

by 시니어더크


토요일 오후, 잠깐 소나기가 쏟아졌다.

금세 그치고 다시 낮게 흐린 하늘이 이어졌다.

그 무렵, 유독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정숙 씨와 함께 바라보던 아파트 화단의 앵두나무였다.


정숙 씨가 떠난 뒤 계절은 두 번이나 바뀌었고,

벌써 여름이다.

기온은 연일 30도 안팎을 오르내리고,

소나기가 내려도 후텁지근한 더위는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땀방울은 얼굴을 타고 흐르고, 피부는 쉽게 지쳐간다.


그래도 여름이 좋다.

젊은 시절엔 겨울을 더 좋아했던 것 같지만,

나이가 들어서부터는 따뜻한 계절이 편해졌다.

정숙 씨도 그랬지.

"추운 것보단 덥더라도 여름이 낫지."

우리 둘은 그렇게 말하며 웃곤 했다.

아예 따뜻한 나라에서 살아볼까,

장난처럼 얘기하던 기억도 난다.


여름이 되니 과일나무들이 제각기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앵두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붉게 익는다.

햇살을 머금은 앵두알들이 나무 가지마다 탐스럽게 매달려 있었다.

참 곱고 선명한 색이었다.

사람들이 흔히 '앵두 같은 입술'이라고 하는 그 표현이

괜한 말이 아니었다.


정숙 씨와 함께 걷던 아파트 단지,

그 길 끝에 늘 자리 잡고 있던 그 앵두나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에 잠겼다.

정숙 씨가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맘때면 빨갛게 익은 앵두를 하나 따서

"달콤하네요."하고 웃던 그 모습이

자꾸 마음을 어지럽힌다.


저녁 때는 인천 길병원에 입원해 계신 셋째 형님을 다녀왔다.

며칠 전 갑작스럽게 배가 아프다며 급히 입원하셨다고 한다.

복수가 차올라 배가 딴딴하게 부어 있었다.

지금도 관을 통해 물을 빼내고 계셨고,

정확한 원인을 찾기 위해 여러 검사를 진행 중이었다.

결과는 월요일에 나온다고 한다.


침대에 누워 계신 형님의 모습은

예전에 뵈었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얼굴은 핼쑥해졌고, 몸무게도 많이 빠졌다고 했다.

환자복을 입은 탓일까 생각도 했지만,

실상은 많이 마르신 게 사실이었다.


정숙 씨를 오래 간병하며 익숙해진 병원의 풍경 속에서

나도 모르게 병실 구석구석을 살피게 되었다.

침대에 덮인 병원용 이불은 꺼칠꺼칠하고 너무 무거워 보였고,

깔린 시트도 몸에 닿기엔 거칠게 느껴졌다.

조금 더 부드러운 이불이나 패드를 챙겨다 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조카들이 미처 그런 부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보다.


욕창도 걱정되었다.

오랜 시간 누워 계시면 엉덩이나 등, 발뒤꿈치에 쉽게 생기기 마련인데

간호사에게 예방 조치를 부탁하긴 했지만,

병원마다 관리 방식이 다르다 보니

마음 한편이 불안했다.

형님께 더 큰 고통이 오지 않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정숙 씨도 예전에 어느 대학병원에서 원인을 찾지 못한 채

몇 달을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고생만 하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이 떠올라 형님께 말씀드렸다.

혹시라도 월요일에 결과가 나오지 않거나

명확한 진단이 어렵다면,

더 고생하지 마시고 서울 큰 병원으로 옮기시라고.

다만 직접 말씀드리는 것보다는

조카들에게 따로 얘기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형님 병문안을 가며 과일을 사려고 근처 가게들을 찾아 헤맸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겨우 찾은 조그만 슈퍼에서는 과일값이 너무 비쌌다.

사과, 참외, 체리, 바나나, 키위…

이런저런 과일을 사서 병실 냉장고에 넣어드리고 나왔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두 시간이 훌쩍 넘게 걸렸다.

걱정을 안고 도착한 집엔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늦은 저녁을 함께 차려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했지만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앵두나무를 보며 아내를 떠올리고,

병원에 계신 마른 형님의 모습을 보고 오니

마음이 더 울적해졌다.

그런 하루였다.


내일은 정숙 씨가 있는 공원으로 갈 생각이다.

자주는 못 가더라도

한 달에 한 번은 잊지 않고 찾아뵙고 싶다.

정숙 씨가 좋아하던 장미꽃 한 다발, 꼭 안고 갈게.

언제나처럼 웃으며 맞아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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