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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그 이름들

60년 만의 봄바람을 맞다

by 시니어더크


장맛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
그런데 아침의 잠실은 뜻밖에도 맑았다.
구름은 조금 있었지만, 시원한 바람이 기분을 들뜨게 했다.
비가 올 것 같지 않은 하늘.
마음이 괜스레 소풍 전날처럼 설레었다.


어릴 적, 소풍 가기 전날 밤이면 잠이 오지 않았다.
혹시라도 비가 올까 봐, 눈을 감았다 뜨기를 수차례.
오늘 아침 내 마음이 그런 이유는 분명했다.
육십여 년 전, 함께 국민학교를 졸업한 친구들과 야유회를 가기로

한 날이었다.


집에서 지하철을 타고 잠실역에 도착했다.
한산한 토요일 아침, 앉을자리가 많았다.
교통회관 앞으로 8시 반까지 모이라는 공지가 있었다.
나는 조금 일찍 도착해 기다렸다.


아내를 떠나보낸 뒤, 처음으로 나가는 모임이었다.
내가 가겠다고 한 것도 아니었다.
여자 총무님이 먼저 내 이름을 명단에 올려두셨다.
고맙고도 조심스러운 마음.
그래도 나는 나가고 싶었다.
친구들도 보고 싶었고,
바람도, 햇살도, 말없이 걷는 길도 그리웠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두 명의 친구가 먼저 와 있었다.
생각보다 적은 인원.
시간이 되었는데도 이 정도라니,
아직도 '코리안 타임'은 건재했다.


예정보다 30분 정도 늦게, 버스는 출발했다.
우리는 25인승 소형 버스를 타고 충북 음성으로 향했다.
총 15명.
일부는 따로 출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모두 충주 중원 군 신니면에 있는 초등학교 동창들이다.
코흘리개 시절, 들판을 뛰놀던 그 친구들.


지금은 모두 흰 머리카락과 주름이 자리 잡았지만,
웃을 때 그 눈빛은 여전했다.
세월이 만든 얼굴보다,
기억 속 그 시절의 표정들이 더 선명했다.


하남 IC를 지나, 중부고속도로를 달렸다.
일죽에서 빠져나와 목적지로 향하던 길.
우리는 '봉학골 자연휴양림'에 잠시 들렀다.


토요일임에도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차창 너머로 흘러가는 풍경이 마음을 가라앉혔다.


휴양림에 도착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계곡을 따라 그늘진 산책로를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산 아래 바람은 시원했고, 햇살은 적당히 가려져 있었다.


작은 저수지가 보였다.
두 친구와 함께 둘레를 한 바퀴 돌았다.
낚시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저수지 옆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즐비하게 피어있는 것도

너무 아름다웠다.

친구 하나는 계속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순간, 아내가 떠올랐다.
이 길을 함께 걸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손을 잡고 말없이 걷던, 그 평온한 시간이 생각났다.
그리움이 가슴을 건드렸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산책을 마친 뒤, 우리는 음성읍에 있는 한 수산물 식당으로 갔다.
친구의 딸 부부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광어회와 쓰끼다시가 푸짐하게 차려졌다.
상 위의 음식보다, 그 자리에 함께한 얼굴들이 더 반가웠다.


회장은 나를 소개했고, 나는 조용히 인사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중고등학교까지 함께한 사이지만,
나는 6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와서 인연이 끊겼다.
그래서 처음엔 조금 서먹했다.


하지만 금세 예전처럼 웃음이 터졌고,
누구랄 것 없이 농담이 오갔다.
세월은 많은 걸 바꿨지만,
우리 사이의 거리만큼은 여전히 가까웠다.


식사 후엔 '품바축제'가 열리는 행사장을 구경했다.
공연 시간은 맞지 않아 메인 무대는 보지 못했지만,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뜻밖의 활기를 느꼈다.


이 작은 도시에도 이렇게 많은 삶이 모여 있다는 것.
그 풍경이 낯설고도 따뜻했다.


날이 더워졌다.
근처 카페에 들러 시원한 음료를 마셨다.
시골에 살고 있는 친구들은 그곳에서 헤어졌다.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창밖으로 펼쳐진 시골 풍경이 정겹고 평화로웠다.
고향과 가까운 곳이라 그런지, 더 마음에 남았다.


그중 한 친구는 음성 노인회 회장이라 했다.
우리 나이도 그럴 나이가 되었구나.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뭔가가 튀어나왔다.


서울에 도착하고
나는 다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니

밤 9시 20분이 되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오래도록 따뜻했다.
아내가 떠올랐다.
"오늘도 잘 다녀왔어요."
문 앞에 들어서며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그 하루는 끝났지만,
그 시절 친구들과의 기억은
다시 이어질 삶의 작은 불빛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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