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가 된 하루
반복되는 하루가 있다.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운동을 다녀오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나열이지만, 그 모든 순간마다
나는 당신을 생각한다.
당신이 없는 지금, 나는 여전히 당신과 함께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찬장 위 정리된 그릇 하나, 현관 앞에 놓인 신발,
마당을 거니는 강아지의 걸음에도 당신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흔적들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잔잔히 파문을 일으키고,
나는 그 속에서 여전히 당신을 살아낸다.
강아지는 요즘 자주 당신이 늘 앉던 자리에 앉는다.
푹 꺼진 소파에 엎드려 조용히 눈을 감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보다 먼저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그 장면을 가만히 바라보다 보면 괜히 마음이 울컥해지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된다.
"거기, 편안해요?"
기억 속 얼굴은 늘 고요한 미소를 띠고 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언제나 고통과 시련이 자리하고 있었다.
병상에서의 날들, 투석실로 향하던 아침, 약 기운에
말없이 잠들던 저녁.
그 시간을 묵묵히 견뎌냈고, 나는 곁에서 손과 발이 되어 움직였다.
힘들었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시간이 내겐 참으로 소중했다.
당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하루였고,
그 하루들이 쌓여 내 삶이 되었다.
우리가 함께했던 날들.
그 일상엔 특별한 일이 없었지만,
당신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세상은 충분히 따뜻했다.
그때 "힘들다"라고 했던 말들, 지금 생각하면 후회된다.
그 말은 참아야 했고, 당신 앞에서조차 흘려서는 안 될 말이었는데.
미안하다. 부끄럽다.
이제는 혼자 살아가는 하루지만
그날들을 놓지 않으려고 애쓴다.
혹시 시간이 더 지나고, 계절이 몇 번 바뀌고 나면
당신의 얼굴을, 그 따뜻한 목소리를 잊게 되는 건 아닐까.
그게 문득 두렵다.
그래서 오늘도 블로그에는 여전히 편지를 쓰고 있다.
'A Letter to 정숙'이라는 이름 아래,
하루하루를 기억 속에서 다시 꺼내어 적는다.
이 편지를 쓰는 시간만큼은 마주 앉아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다.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도 눈물도 함께 나누는 그런 시간.
편지는 하루의 끝을 지탱해 주는 조용한 의식이 되었다.
그리고 말이에요.
혹시 거기서도 이 편지를 읽고 있나요?
글씨체는 디지털로 딱딱하지만,
글 하나하나에 당신을 떠올리며 꾹꾹 눌러써 내려간 거예요.
또 한 가지.
나는 내 몸과 마음을 정성껏 돌보려 한다.
치매가 오면 안 되니까.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때, 흐릿한 기억으로 마주하고 싶지 않다.
또렷한 정신으로, 건강한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고 싶다.
그래서 운동도 하고, 책도 읽고, 글도 쓴다.
이 모든 일상은 당신을 위한 기다림이다.
예전처럼 쉽게 눈물을 흘리지는 않는다.
당신에게 매달 드리는 꽃처럼,
나도 내 삶을 가꿔가고 있다.
시들지 않도록, 맑고 단단하게 살아가고 있다.
삶의 향기가 바람을 타고 당신에게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묵묵히 하루를 지낸다.
오늘도 당신이 없는 하루를 살아냈다.
하지만 당신 없는 하루는,
결코 당신 없는 삶이 아니었다는 걸
나는 오늘도 새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