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잊다

전공의 파업이 남긴 아주 사적인 상처

by 시니어더크



전공의 파업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나라 전체가 뒤숭숭했고, 병원마다 진료 공백으로 환자들이 길 위를 헤맸다.

응급실은 닫혔고, 수술 일정은 연기되었으며, 생사의 갈림길에 선 이들은

갈 곳을 잃은 채 차디찬 대기실을 떠돌았다.


그 와중에 아내의 맹장이 터졌다.

항암치료로 이미 체력이 바닥이었던 아내는 복막염까지 번진 상태였지만,

그조차 당장 받아줄 병원이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내가 항암치료를 받던 바로 그 대학병원에서도

전공의 부재로 응급실은 폐쇄되었고, 입원은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렇게 우리는 일주일을 떠돌았다.

약과 진통제로 버티며 병세는 깊어졌고, 마침내 다시 처음 그 병원으로 돌아가

교수님이 직접 수술을 하겠다고 나서며 간신히 입원이 허락되었다.

이미 병은 깊게 파고들어 대장을 절제해야 하는 대수술로 이어졌고,

예정에도 없던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 후 며칠, 아내는 심각한 섬망 증상을 보였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시간과 공간, 감정의 경계마저 무너지는 깊은 혼란의 세계.


새벽 세 시, 병실 한구석에서 아내가 울부짖었다.

"남편 좀 데려와 주세요! 왜 아무도 불러주질 않아요!"


나는 곁에 앉아 있었지만, 아내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급히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자다 말고 병원으로 달려온 언니와 형부는

아내가 곧장 알아보았다.

정작, 수술 전후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간병했던 나는

그녀의 기억에서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네 앞에 있는 사람이 바로 남편이야."

언니는 그렇게 아내를 다독이고, 애써 타이르며 두 시간 넘게 설득했다.

겨우 진정된 아내는 잠들었지만,

그날 내 마음은, 그 어떤 수술보다도 깊은 상처를 입었다.


섬망은 그렇게 찾아왔다.

그리고 며칠 뒤, 아내는 나를 다시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증상은 몇 차례 반복되었고, 결국 정신과 약을 함께 복용해야 했다.

아내의 마음은 여전히 따뜻하고 맑았지만,

몸과 마음은 병으로 인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 시기, 전공의 파업으로 인한 초과사망자 수는 3,136명에 달했다.

비공식 추산으로는 6천에서 1만 명까지 이른다고 한다.

그중 누구도 이름을 알지 못하고,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삶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 수치 속에 아내도 있었을 것이다.

응급처치가 제때 이뤄졌더라면, 수술을 조금만 앞당길 수 있었더라면

그 이후의 병세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묵직해진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도,

그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그날의 새벽.

나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그날,

아내는 나를 잊었고,

나는 아내를 더욱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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