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숨결까지도 함께하는 하루
뜨겁게 바닥을 달구던 8월의 붉은 태양은 어느새 기세를 잃어가고 있었다. 개학을 앞둔 아들이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어, 아내와 나는 이른 아침 함께 집을 나섰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아내는 창밖을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뿌옇게 일렁이는 여름 끝자락의 공기 속에서, 그녀의 눈빛은 어느새 자라는 아이를 향한 아련한 걱정과 기대를 조용히 담고 있었다.
정오 무렵 학교 앞 작은 원룸에 도착해 짐을 옮겨 놓고 나니, 좁은 방을 천천히 둘러보는 아내의 손끝이 유난히 더디게 움직였다. 잠시 뒤 가까운 식당에 들어가 청국장과 김치찌개를 시켜 먹었는데, 아내는 한 숟가락 뜨고는 "역시 집밥이 제일이네요" 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은 맛의 비교라기보다, 평생 자신이 만들어 온 밥상이 아들에게 닿지 못하는 순간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마음처럼 들렸다.
아들을 내려놓고 돌아오는 길, 아내의 전화가 짧게 울렸다. 조금 전 원룸에 다시 올라가 가져간 짐을 하나하나 정리해 두었다는 소식이었다. 허전한 방 안에서 혼자 첫날을 보내고 있을 아들을 떠올리자, 차창 밖 풍경이 어쩐지 더 멀게 흘러갔다. 낯선 도시에서 자취를 하며 공부한다는 일이 쉽지는 않을 텐데, 그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스스로 바라던 꿈을 이루어 행복한 삶을 꾸려가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아들은 우리가 이것저것 챙겨 묻는 말을 귀찮아하며 종종 짜증을 내곤 했다. 그럴 때면 아내는 조용히 미소만 지었고, 나는 대답 대신 창밖을 바라보았다. 풍족한 지원을 해주지 못하는 우리의 사정이 혹시 아이 마음에 얇은 그림자를 드리운 것은 아닐까, 돌아오는 길 내내 말로 다 꺼내지 못한 생각들이 마음속에서 길게 이어졌다.
어쨌든 아들과 딸은 이제 제 나름의 길을 걸어가는 성인이 되었다. 그렇게 아이들의 삶이 스스로 굴러가기 시작하자, 남은 마음은 자연스레 아내에게로 기울었다. 긴 시간 이동을 하고 난 뒤라 그런지, 그녀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기운이 빠져 보였다. 진통제 아홉 알을 챙겨 먹고, 그 위에 아스피린 한 알을 더 삼키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더운 날씨가 그녀의 몸에 더 큰 부담을 준 것은 아닐까 조용히 짐작했다.
아르바이트를 마친 딸이 곧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었지만, 나는 전화기를 들어 미안한 마음을 먼저 전했다. 몸이 지친 아내 곁을 잠시라도 떠날 수 없을 것 같아 오늘만큼은 데리러 나가지 못하겠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딸은 흔쾌히 알겠다며 웃어 보였고, 그제야 나는 조금 안도했다. 하루의 끝에서야 비로소, 우리가 서로를 돌보는 방식이 이렇게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조용히 깨달았다.
다음 날, 아들이 떠난 집안은 어쩐지 한쪽이 비어 있는 방처럼 허전했다. 가족이 함께 지내던 자리에서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일까. 하얀 도화지 위에 가득 그려져 있던 그림이 서서히 지워져 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언젠가 두 아이 모두 출가하게 되면 이 집은 지금보다 더 텅 빈 공간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낮에는 아내와 함께 집 근처의 나즈막한 도락산을 찾았다.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산을 오르고 물가를 걸으며 몸을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이 요즘 따라 더 간절해졌다. 저수지를 지나 청소년수련원 뒤편으로 접어들자 도락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작은 등산길이 나타났고, 옆으로는 맑은 계곡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그 근처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가져온 감자와 콘칩을 나누어 먹었다. 이따금 책을 읽고, 잠시 대화를 나누고, 계곡 바람이 실어오는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천천히 시간을 보냈다.
그 순간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이런 시간이 바로 행복이 아닐까. 몸만 건강하다면, 이런 소박한 하루야말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삶일 텐데.
한 시간 반쯤 지나 산길을 천천히 내려와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며칠 전부터 몸 상태가 들쑥날쑥했는데, 마음으로는 산을 오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막상 올라보니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앞으로는 더 조심스럽게, 그러나 꾸준히 몸을 움직여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마음속에 새겼다.
집에 돌아오니 저녁 공기 속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내일이면 대형 태풍 '볼라벤'이 한반도로 올라온다는 소식이 전국을 뒤흔들고 있었다. 부디 큰 피해 없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베란다 유리창마다 X자로 테이프를 붙였다. 거센 바람에도 유리가 버텨주기를 바라며,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작은 기도를 올리듯 손끝을 천천히 움직였다.
시간이 흘러 새 아침이 밝았지만, 태양은 두꺼운 검은 구름 속에 갇힌 듯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밤새 예고되던 바람이 집 주변을 거칠게 휘몰아쳤다. TV에서는 제주도와 남해안 일대의 피해 소식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초속 60미터에 육박하는 강풍과 수백 밀리의 폭우가 쏟아졌다는 화면을 바라보며, 어젯밤 베란다 창문에 테이프를 붙이던 우리의 손길이 떠올랐다.
다행히 이번 태풍은 내륙을 비켜 서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피해가 예상보다 적었다고 했다. 그러나 북쪽으로 향한 태풍의 길목에서는 또 다른 수마의 상처가 남을 것이라는 말이 이어졌다. 바람이 잠시 멎은 창밖을 내다보며,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아침을 먹고 난 뒤, 아내는 조용히 주방으로 들어가 감자를 들었다. 며칠째 몸이 좋지 않았으니 오늘만큼은 쉬자고 말렸지만, 그녀는 아무 대답 없이 감자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칼끝에서 벗겨진 껍질이 길게 흘러내리고, 채 썬 감자가 후라이팬 위에서 지글지글 소리를 내자 주방에 따뜻한 향이 퍼졌다. 소금을 한 꼬집 뿌리는 순간까지도 그녀의 표정은 묵묵했다.
나는 그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기만 했다. 반찬 하나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아내의 뒷모습이 왜 그리 여려 보였는지, 마음에 걸리는 일들이 많으면서도 정작 내가 나서서 대신하지 못한 시간이 길게 떠올랐다. 반찬도 만들고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해야지 늘 생각만 했지, 몸이 먼저 움직여주질 않았다. 아내가 힘겹게 움직이는 걸 보면서야 그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요즘 부동산 경기가 워낙 얼어붙어 다시 사무실을 내는 일도 선뜻 결정하기 어려웠다. 남은 자금을 개업비용으로 모두 써버리면 당장 필요한 생활비가 빠듯해질 것 같아 마음이 자꾸만 쪼그라들었다. 결국 일자리를 찾기로 하고 전봇대 아래 걸린 벼룩시장 광고지를 살짝 떼어 품에 넣어 집으로 돌아왔다. 식탁에 앉아 한 장씩 넘겨 보다가 전화기를 들어 몇 곳에 연락을 해 보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서는 감정이 실리지 않은 "노"라는 대답만이 반복되었다. 나이도 어느덧 환갑을 바라보니 문턱은 더 높아 보였다. 그래도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마음 한쪽을 조용히 눌렀다.
오후가 되자 아내는 쇼파에 기대어 화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이 아래로 미끄러지듯 흘러내렸다. 아침에는 한결 나아 보였지만, 또다시 기운이 빠지는지 얼굴빛이 흐려졌다. 나는 그녀 옆에 바싹 다가앉아 팔을 번갈아 주물러 주며 진통제 세 알을 손에 쥐어 주었다. 늦은 시간이 되자 목에서 따가운 통증이 새어 나왔고, 감기약과 목에 뿌리는 약을 조심스레 건네주었다. 체온계를 대어 보니 37.4도를 가리켰다. 몸이 약해지면 으레 열이 먼저 오르곤 했다. 작은 숫자 하나에도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늘의 달력 한 장이 뜯겨 나가 과거로 넘어가고, 새로운 날짜가 조용히 오늘을 가리켰다. 거세던 태풍 '볼라벤'이 지나간 뒤, 오랜만의 햇살이 문틈을 스며들며 방 안을 밝게 적셨다. 우리는 미리 예약해 둔 광릉수목원으로 향했다. 숲속 길은 맑은 공기와 풀 냄새로 차 있었고, 태풍이 남기고 간 나뭇가지들이 여기저기 옆으로 누워 있었다. 나는 휠체어 손잡이를 천천히 밀었고, 아내는 바람을 들이마시며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숲이 그녀의 폐 깊숙이 맑은 산소를 밀어 넣어 주는 듯했다.
두 시간 반을 그렇게 걷고 바람을 마셨지만, 늦은 오후가 되자 이마 위로 다시 뜨거운 기운이 맺히기 시작했다. 집에 도착하니 아내의 걸음은 조금씩 흔들렸고 표정도 힘겨워 보였다. 지난주 헤모글로빈 수치가 낮았던 탓인지 피로가 더 빨리 밀려오는 듯했다. 나는 진통제 여섯 알을 손에 쥐어 주고, 그녀의 두 손을 번갈아 조심스레 주물러 주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미세하게 굳어 있던 근육이 서서히 풀리는 동안, 저녁빛은 거실 바닥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고요한 빛 속에서 나는, 오늘 하루 우리가 버텨낸 시간의 무게를 조용히 어루만져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