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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돌아온 희망의 7월

흔들리던 날들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작은 빛의 기록

by 시니어더크



다음날 아침, 우리는 노원구 마들역으로 향했다. 한때 삶의 여러 해가 스며 있던 동네였다. 버스 노선 하나, 골목의 굴곡 하나까지 몸이 먼저 알아보았다. 지나가는 발소리, 단지 앞 꽃나무의 흔들림만으로도 그 시절의 공기가 되살아났다.


그곳을 찾은 이유는 단순했다. 아내의 얼굴에 있는 점 하나와 내 목 뒤의 일곱 개 점을 빼기 위해서였다. 늘 '언젠가 하자'며 미뤄두었던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날만큼은 꼭 정리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목 뒤의 점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 괜히 속이 시원해졌다. 아내도 시술을 마치자 "별로 안 아프네" 하며 가볍게 웃었다. 그 작은 웃음 속에는 오랜 투병과 이식을 견뎌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함이 스며 있었다. 항암과 이식을 통과해온 그녀에게 점 하나 빼는 고통이란, 어쩌면 고통이라 말하기도 민망한 일이었을 것이다.


피부과를 나선 우리는 석관동 카센터로 이동해 자동차 점검을 받았다. 차가 조금이라도 편안하면 아내의 몸도 덜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엔진 소리를 확인하는 동안, 우리는 조용히 나란히 서서 그동안의 시간을 떠올렸다. 이런 평범한 일상이 한때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점검을 마친 뒤 남양주시 진접에 있는 처형 집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따끈한 밥 냄새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지난 시간 동안 자주 찾아가지 못했던 미안함과 오랜만에 마주한 반가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처형은 텃밭에서 갓 따온 상추와 깻잎, 고추를 한가득 내어놓았다.


"이거 가져가서 잘 챙겨 먹어."


그 야무진 손길에는 말보다 먼저 전해지는 마음이 있었다. 우리가 다시 잘 버텨낼 수 있도록 응원의 기운을 건네는 듯했고, 그 속에는 가족 특유의 따뜻함과 오래된 정이 깊게 배어 있었다.


며칠 뒤, 아내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네요. 휠체어 타고 잠깐만 나가볼까요?"


가벼운 듯 들렸지만, 사실은 오랜 시간 병실과 집 안에서만 머물러온 그녀가 마음을 밖으로 조금씩 열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우리는 휠체어를 천천히 밀며 덕계역 주변으로 나갔다. 지금은 고층 아파트와 상가가 빼곡하지만, 그 시절만 해도 그곳은 넓게 펼쳐진 논둑길이었다. 길가에는 황금빛 벼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잔잔한 파도를 만들고 있었고, 메뚜기들이 풀숲에서 뛰어오를 때마다 아내는 "깜짝이야" 하며 웃었다. 한쪽에는 달맞이꽃이 떼를 지어 피어 있었고, 그 소박한 노란빛은 투병의 긴 시간을 견디느라 지친 그녀의 마음을 조용히 감싸는 듯했다.


우리는 그 길을 아주 천천히 걸었다. 마치 예전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이 서로 손을 맞잡고 흐르는 것처럼, 오래된 추억이 발끝에 스며들고 새로운 하루가 조용히 그 위에 겹쳐졌다. 그 순간만큼은 아내도, 나도 병의 그림자를 잊고 오직 바람과 햇살과 서로의 존재만을 느끼며 걸었다.


그날 우리는 서로의 삶에 얽힌 실타래가 다시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주 작은 산책이었지만, 그 작은 시간이 하루 전체를 아름답게 덮어주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또 하루가 흘러갔다. 아침에는 안개가 자욱해 세상이 잠시 흐릿하게 보였지만, 해가 떠오르자 금세 제 빛을 되찾았다. 안개가 걷히고 햇살이 퍼져 나가는 모습은 마치 하루의 방향을 다시 잡아주는 듯했다.


은행 일을 마친 뒤에는 덕계공원을 한 바퀴 돌고, 새로 생긴 마트에도 들렀다. 한때 북적이던 그 마트는 시간이 지나자 손님이 끊기고, 결국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간판조차 흔적이 없다. 그 자리에는 허허로운 빈 공터만 바람에 흔들릴 뿐이다.


세상은 이렇게 쉬지 않고 바뀐다. 우리는 그 변화 속에서 다시 자리를 잡기 위해 몸과 마음을 재정렬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뒤, 언니가 챙겨준 야채들을 씻고 된장국을 끓였다. 나는 닭볶음탕을 준비하느라 주방을 분주히 오갔고, 오랜만에 네 식구가 둘러앉아 따뜻한 저녁을 함께했다.


밥상 위로 퍼져 나오는 된장국 냄새, 채소의 숨이 죽어가며 만들어내는 편안한 향, 식구들이 숟가락을 부딪히는 소리가 그날따라 유난히 정겹게 들렸다. 작은 식탁 위에서라도 이렇게 모여 앉아 있는 풍경이 참 소중하게 느껴졌다.


식사를 마친 뒤, 나는 아내의 진통 패치를 조심스럽게 떼어내고 새것을 붙였다. 통증이 심해 두 개 반만 붙일까 고민하다가 결국 세 개를 모두 붙이고 말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통증의 강도가 달라지는 아내의 몸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일은 늘 가슴 한쪽을 쿡 찌르는 듯한 아픔을 남겼다.


줄여야 할 약을 되레 늘려야 하는 현실은 말없이 마음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럼에도 아내는 "괜찮아요"라는 듯 잠자코 나를 바라보았고, 그 눈빛 하나가 또 하루를 견디게 하는 힘이 되었다.


딸은 오븐에서 갓 구워낸 따뜻한 빵을 식탁 위에 남겨두고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갔다. 내가 넉넉하게 등록금과 용돈을 챙겨주지 못하는 형편이니, 딸은 스스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마음을 단단히 다진 듯했다.


그 마음을 알기에, 딸이 집을 나서기 전 밝게 웃으며 "괜찮아요, 아빠"라고 말해줄 때마다 오히려 가슴 한쪽이 저릿하게 아려왔다. 웃음 속에 담긴 책임감과 다부짐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학생의 신분으로 공부를 하면서 두 가지 일을 병행하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지, 나는 잘 안다. 늦은 밤 돌아와 지친 몸으로도 씻고 책상 앞에 앉아 과제를 하는 딸의 모습을 볼 때면, 미안함과 고마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아내의 치료와 통원 일정, 집안 살림을 챙기느라 내가 다시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자꾸만 마음에 남았다. 부동산을 다시 열어야 할지, 아니면 아예 다른 직장을 찾아야 할지, 어느 쪽을 선택해도 쉽지 않은 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내의 회복이 우선이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조용히 말했다.


'지금은 욕심내지 말자. 오늘을 먼저 넘기자.'


머릿속을 휘저으며 올라오는 무거운 생각들은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어차피 고민은 내일도, 모레도 형태만 달리해 찾아올 테지만, 아내의 오늘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녀가 숨을 고르고, 통증을 견디며 하루를 버텨내는 그 순간에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의외로 단순했다.


곁을 지키는 것, 손을 잡아주는 것,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믿고 있다는 조용한 신호를 보내주는 것.


7월의 마지막 무렵, 아내는 아침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싱크대 위에 줄지어 놓인 오이와 양념들을 살뜰히 챙기더니 오이장아찌를 담그기 시작했다. 이어 작은 볼 안에 삶은 가지를 담고 조심스레 양념을 더해 가지나물을 무쳤다.


손끝으로 재료를 다루는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그 조심스러운 손놀림이 낯설면서도 반가워, 나는 한참 동안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물 한 모금 넘기는 일조차 힘겨워하던 사람이었다. 입맛을 잃어 숟가락을 드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고, 음식 냄새만 맡아도 메스꺼움이 올라오던 날들이 얼마나 길었는지 모른다. 그랬던 아내가 나물을 직접 무쳐 한 그릇 비벼 먹을 수 있을 정도까지 돌아온 모습은 그저 '괜찮아졌다'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마치 잃어버린 계절이 서서히 돌아오는 듯한, 깊고도 조용한 회복의 기운이 느껴졌다.


물론 회복이라 부르기엔 여전히 갈 길이 멀었다. 통증은 여전히 그녀의 몸 곳곳에 남아 있었고, 체력 또한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불안한 바람 같았다. 하지만 그날 아침 부엌에서 나물 향이 은근히 퍼지는 순간, 나는 분명히 느꼈다. 그녀의 몸 어딘가에서 다시 살아 있는 힘이 천천히 솟아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 작은 변화가, 우리에게는 눈물나게 큰 희망이었다.


하지만 몸속에 남아 있는 가래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진통제 역시 여전히 많이 먹어야 했다. 히크만관 소독은 매일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관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혹시 빠지지 않을까, 샤워할 때 물이 스며들지는 않을까. 소독솜을 들어 닦아낼 때마다 사소한 걱정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을 건드렸다.


그러나 그 모든 수고 속에서도 나는 단 한 번도 마음을 접지 않았다. 힘든 날이 반복되어도, 어떤 날은 통증 때문에 그녀가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해도 나는 흔들리지 않으려 했다. 그녀가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도록, 언제든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지탱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마음 하나만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만의 약속이었고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했다.


드디어 7월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새벽까지 창문을 두드리던 천둥 번개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하늘은 파란빛을 되찾았다. 비에 씻긴 공기는 맑고 가벼웠고, 그 속에서 아내의 몸도 조금씩 회복의 기운을 띠어갔다. 하루하루가 조심스러운 걸음이었지만, 분명히 그녀의 얼굴에는 전에 없던 온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집 안에도 오랜만에 따뜻한 사람 냄새가 감돌며, 우리가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일상의 결이 서서히 살아나고 있었다.


물론 고민은 여전히 산처럼 쌓여 있었다. 통증, 약 부작용, 통원 치료, 그리고 경제적인 부담까지. 생각하려면 끝이 없었다. 그러나 그 무게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서 아주 작은 희망이 조용히 피어올랐다.


그날 저녁, 창가에 앉아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로 남은 빛이 길게 퍼져 있었고, 바람은 하루의 열기를 조금씩 식혀내고 있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깨달았다.


무너질 듯 흔들리던 시간 속에서도, 사람은 결국 다시 희망 쪽으로 기울어지는 존재라는 것을. 절망의 벽에 부딪혀도 어느 순간은 다시 빛을 찾고, 그 작은 빛 하나에 몸을 기대며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는 것을.


그렇게 우리의 7월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회복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내도, 나도.


7월의 마지막 날을 지나며 우리는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새겼다. 느리더라도 괜찮다고, 이 길 위에서 서로의 존재가 가장 큰 희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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