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14
아내와 함께한 38년, 그리고 마지막까지 이어진 사랑. 돌이켜보면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웃었고, 함께 울었으며, 때로는 삶의 무게에 지쳐 서로를 의지하며 버텨왔습니다. 사랑이란 것이 당연하게 주어지는 줄 알았던 젊은 날도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 사랑은 함께한 시간 속에서 더욱 깊어지고 단단해졌음을 깨닫습니다.
아내는 오랜 세월 병마와 싸워왔습니다.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이겨내기로 했고, 희망을 놓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수많은 치료와 고통 속에서도 아내는 늘 씩씩하게 웃으며 오히려 저를 안심시켰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병은 점점 아내를 약하게 만들었고, 저는 그 곁에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력함에 절망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는 긴 여정을 마치고 제 곁을 떠났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아내 없는 삶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함께했던 시간은 여전히 선명한데, 현실은 너무나 낯설고 버겁기만 했습니다. 아내가 있던 자리에 남겨진 빈 의자, 함께 걷던 길 위에 홀로 선 나 자신, 아내의 체온이 남아 있던 침대 위에서 마주한 차가운 밤. 매 순간 아내의 부재를 실감하며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슬픔 속에서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함께한 사랑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음을. 아내는 떠났지만, 아내가 제게 남겨준 사랑은 여전히 제 안에 살아 있습니다. 함께했던 순간들, 따뜻했던 기억들, 아내의 웃음과 손길, 그리고 아내가 제게 가르쳐준 삶의 의미. 이 모든 것이 지금의 저를 살아가게 합니다.
이 글은 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지켜보고, 떠나보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남겨진 사랑이 어떻게 삶을 이어가게 하는지에 대한 기록입니다. 슬픔과 그리움 속에서도 사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눈물 속에서도 피어난 사랑, 그 사랑이 저를 살아가게 합니다.
의정부에 있는 대학병원 응급실. 그곳이 아내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한 장소였습니다.
아내는 병상 위에 누워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맥박은 수축한다기보다는 파르르 떨리는 움직임으로 나타나며, 너무나 연약한 모습으로 숨을 내쉬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습니다. 의사도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정말 보내드려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날 저녁, 처형 부부가 다녀갔습니다. 그것이 아내와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처형과 아내는 여덟 살 터울이었지만, 마치 어머니가 딸을 보살피듯 아내를 돌봐 주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정을 나누며 지냈고, 결혼 전에는 서울로 올라온 아내를 처형 부부가 데리고 살았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아내의 병세가 깊어질수록 처형의 마음도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처형은 아무 말 없이 아내의 손을 잡았습니다. 긴 세월을 함께한 두 사람 사이에는 더 이상의 말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손을 꼭 쥔 채 바라보는 언니의 눈에서는 이별을 받아들이기 힘든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결국, 처형은 참아왔던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아내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마지막으로 사랑을 전하듯 속삭였습니다.
"많이 힘들었지... 이젠 편안해야 해."
흐느낌을 삼키는 처형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마치 어린 동생을 달래듯 조심스러웠습니다. 그 순간, 아내도 마지막 힘을 내듯 손끝을 살짝 움직였습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처형 부부는 한참을 더 머물다 조용히 돌아갔습니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처형은 뒤돌아보며, 아내의 얼굴을 눈에 담으려는 듯 애써 발걸음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때, 우리가 다니는 교회의 담임목사님과 사모님도 오셨습니다. 목사님은 조용히 다가와 아내의 머리맡에 앉았습니다. 아내의 손을 살며시 잡고 눈을 감은 채, 한동안 말이 없으시더니 이내 조용한 목소리로 마지막 임종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제 사랑하는 권사님을 주님의 품으로 인도하여 주소서. 권사님은 오랜 시간 고통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왔고,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왔습니다. 권사님의 눈물과 아픔을 주님께서 다 아십니다. 이제 권사님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고, 주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주님의 손길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권사님을 위해 남편이, 자녀들이,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눈물로 간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이 땅의 모든 삶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며, 언젠가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설 것을 믿습니다. 그러니 이제 권사님을 불러 주실 때, 주님의 평안 가운데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 맞아주시고, 밝고 따스한 빛이 권사님을 감싸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주님, 권사님이 지상의 삶을 마치고 영원한 안식으로 나아갈 때, 두려움이 아니라 평안과 기쁨이 권사님의 마음을 가득 채우게 하소서. 지금 이 순간 천군천사들을 보내시어 권사님의 손을 잡고, 권사님이 외롭지 않도록 함께 걸어 주시옵소서. 이제 권사님이 육신의 짐을 내려놓고,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여 주소서.
그리고 남겨진 가족을 위로하여 주옵소서. 오랜 시간 사랑하며 함께한 남편 최권사님에게, 사랑하는 어머니를 곁에서 지켜본 자녀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평안을 허락하여 주시고, 이별의 아픔을 견딜 수 있도록 강한 믿음과 소망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님, 우리 모두가 다시 만날 날을 소망합니다. 언젠가 주님 나라에서,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아줄 권사님을 다시 만날 때까지, 우리도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기도 소리가 응급실 한쪽에 잔잔히 퍼졌습니다. 우리 가족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했습니다. 아내를 위해, 아내의 평안을 위해, 그리고 남겨질 우리를 위해.
목사님의 기도가 끝났을 때, 아내의 숨은 더욱 가늘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조심스럽게 아내의 손을 감싸 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습니다.
"사랑하는 정숙 씨, 이제 편히 쉬어요.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요."
아내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평온한 표정이었습니다. 마치 긴 여정을 마치고, 오랜 시간의 고통에서 벗어나 편안한 안식을 맞이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2024년 11월 14일 새벽 3시 16분.
아내는 조용히 마지막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 순간, 아들과 딸, 그리고 저는 병상 옆에서 아내를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아내의 손을 꼭 잡았지만, 그 손에서 점점 온기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해도, 이별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내는 오랫동안 병마와 싸우면서도 끝까지 강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걸 내려놓고 조용히 떠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가슴 아파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흐느끼며, 손을 놓지 못한 채 아내를 바라보았습니다. 아들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어깨를 떨며 울었고, 딸은 조용히 눈물을 흘리면서도 아내의 손을 쓰다듬으며 마지막 온기를 느끼려 애썼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떨리는 손으로 아내의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정숙 씨… 나의 사랑하는 정숙 씨…"
아내가 떠나는 순간, 시간은 멈춘 듯했고, 가슴이 찢어질 듯한 슬픔이 병실을 가득 채웠습니다. 하지만 아내의 얼굴은 놀랍도록 평온해 보였습니다. 마치 긴 여행을 끝내고 깊은 쉼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고요하고 편안했습니다.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아내를 붙잡고, 마지막까지 함께했고, 사랑한다고, 너무 고맙다고, 끝없이 속삭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는 한 명씩 교대로 아내의 얼굴에 뽀뽀하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습니다.
"여보, 고생 많았어요. 이제 아프지 말고 편히 쉬어요."
"엄마,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요."
"고통도 없고 아픔도 없는 그곳에서 행복하게 잘 지내세요."
"그리고… 나중에 꼭 다시 만나요."
말을 하면 할수록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대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아내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아내를 바라보며 손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더 이상 우리 곁에 없었습니다.
응급실의 차가운 형광등 불빛 아래,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아내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이 가슴을 짓눌렀습니다.
저는 아내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습니다. 그토록 오랜 시간 병마와 싸우느라 힘들었을 텐데, 이제는 편히 쉬시라고. 고통도, 아픔도 없는 곳에서 평안하시길 바란다고.
창밖에는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병원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저는 천천히 아내의 손을 내려놓았습니다.
아내는 떠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홀로 남겨졌습니다.
말을 하면 할수록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제 정말, 아내와의 작별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새벽 3시 16분, 병원 응급실 한편에서 정숙 씨는 조용히, 아주 평온하게 마지막 숨을 내쉬었습니다. 마치 “이제 괜찮아요” 하고 속삭이는 듯, 아내의 얼굴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한 미소가 어려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정숙 씨는 떠난 것이 아니라, 제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 속에 여전히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아내의 손길, 웃음, 목소리, 믿음, 그리고 사랑.
그 모든 것은 제 마음속에 고스란히 남아 저를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저는 여전히 아내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지만, 이렇게 마음을 꺼내어 글로 쓰다 보면, 마치 아내와 다시 대화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이제, 아내와 함께한 그 긴 시간들을 한 조각씩 꺼내어 기록해보려 합니다.
그 시작은 그날, 2011년 11월의 어느 차가운 토요일 오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