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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리움으로 버무린 하루, 당신의 손길을 따라

정숙 씨에게 보내는 겨울 김장 편지

by 시니어더크

2024년 11월 28일(목) 흐리다 맑음


사랑하는 정숙 씨,

오늘도 당신 생각으로 하루를 열었습니다. 새벽 3시가 넘은 시간,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총각김치를 버무렸습니다. 오랜만에 하는 일이라 그런지 손이 서툴렀어요. 당신이 늘 하던 것처럼 손맛이 깊게 배지 않아 아쉬웠지만, 그래도 당신의 방식대로 해보려 애썼습니다. 당신이라면 옆에서 “고춧가루가 조금 더 들어가야지” 하며 웃었겠지요. 그 다정한 한마디가 얼마나 그립던지요.


그렇게 늦게 잠들고는 아침을 겸한 점심을 먹으려 10시가 넘어서야 일어났습니다. 투석이 없던 날, 우리 둘이 느긋하게 앉아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나누며 웃던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은 작은 반찬 하나에도 기뻐했고, 나는 그 기쁨을 보며 마음이 편해졌죠. 그렇게 단출한 식사 속에도 사랑이 가득했던 날들이 아직도 제 곁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침을 마치고 부랴부랴 리치마트로 향했습니다. 다발무가 세일이라는 소식을 듣고 서둘렀지요. 다행히 몇 단 남아 있었습니다. 약간 굵은 무 여섯 개가 한 단에 7,900원이었어요. 당신이라면 “이 정도면 괜찮네” 하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겠지요. 당신이 살아 있었다면, 우리는 무를 고르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눴을 거예요. 그런 일상이 이제는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마트에서 나오는 길, 당신이 자주 다니던 미용실 앞을 지나쳤습니다. 순간 발걸음이 멈췄습니다.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빠졌을 때 당신은 웃으며 “그래도 다시 날 거야”라고 말했지요. 실제로 치료를 중단하자 조금씩 머리가 나기 시작했고, 우리는 “한 달만 더 지나면 다듬으러 가자”는 약속도 했습니다. 그 약속 하나조차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오늘따라 유난히 가슴을 아리게 하네요.


이후 농협 하나로마트에도 들러 홍갓, 청갓, 사과, 양파, 보리쌀을 샀습니다. 당신이 늘 하던 대로 손으로 눌러보고 무게를 재며, 하나하나 가격을 비교해 장을 봤습니다. 익숙한 동선 속에서 당신의 손길이 느껴졌어요. 계산을 마치고 나오려는데 직원이 내년도 달력을 주더군요. 당신은 매년 달력을 받으면 꼭 새해 계획을 손수 적어두곤 했지요. 이젠 당신 없는 새해를 맞는 것이 아직도 낯설고 두렵기만 합니다. 달력이 있는데도 아들이 당신 사진으로 달력을 만들어준다고 해요. 거실에 걸어두면 마치 당신이 이 집 어딘가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집에 도착해서는 무를 씻고 동치미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당신이 가르쳐준 방식 그대로 따라 했어요. 무청은 끈으로 묶어 발코니 빨랫줄에 널어두었고, 홍갓과 청갓도 손질해 두었습니다. 찹쌀죽을 끓이고, 육수도 그 커다란 스테인리스 들통에 듬뿍 끓였어요. 그 들통은 당신과 함께 그릇가게에 가서 고른 물건이잖아요. 당신이 “이건 오래 써도 안 변해” 하며 골랐던 그 말이 귓가에 다시 들리는 듯합니다.


딸이 김장 준비를 마친 저를 위해 노랑통닭에서 치킨을 사 왔습니다. 후라이드 한 조각을 베어무는 순간, 또 당신 생각이 났습니다. 당신은 닭다리를 내게 주고 날개만 먹던 그 모습 그대로, 지금도 식탁에 앉아 있을 것만 같아요. 지금도 문만 열면 당신이 “다녀왔어” 하며 들어올 것만 같은데… 현실은 아니네요.

당신이 아끼던 화분에도 물을 주었습니다. 겨울을 잘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 되지만, 정성껏 보살피면 봄이 오면 꽃을 피우겠죠. 그 꽃이 피는 날, 당신도 함께 기뻐할 것만 같아요.


오늘 낮에는 큰 형님께서 전화를 주셨어요. 아흔이 넘으신 연세에도 “잘 추스르고 살아가라”며 따뜻한 위로를 건네주셨습니다. 그 말씀에 마음이 조금 놓이기도 했지만, 당신을 잊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나는 여전히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정숙 씨,

이제 육수도 완전히 끓였습니다. 하루를 마치며 이 편지를 씁니다. 오늘 하루도 결국 당신으로 시작해, 당신으로 끝이 납니다. 내일은 김장 양념을 만들 겁니다. 당신이 가르쳐준 그 비율대로 고춧가루, 마늘, 새우젓, 멸치액젓을 섞을 거예요. 혹시 그 맛 속에서 당신의 손길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요?


이제는 혼자 남겨졌지만, 나는 당신과 함께했던 시간들을 붙잡고 살아갑니다. 당신의 흔적이 남은 곳곳을 따라, 당신의 미소와 온기가 배어 있는 일상 속에서 또 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러니 제발, 늘 내 곁에 있어 주세요.

당신을 깊이 사랑하는 남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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