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정서적 자유(마음의 자유)
정서적 자유란 간단히 말하면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당초 감정이 우리를 구속하나요? 과거에 겪어온 경험이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생각과 행동이 제한받기도 합니다. 혹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나 사회적 평판이 자유로운 생각과 행동을 제한하기도 합니다. 그 기저에는 고립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서적 자유를 일깨우면 현재에 충실하여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현재를 살아가야 그 잠재력을 최대한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는 '지금 이 순간'을 뜻합니다. 이와 달리 온 신경이 과거에 머물러 있거나, 미래를 예측하는 데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미래를 그리는 일은 삶을 주도적으로 끌고 나가는 데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미래를 그리는 데에 있어서 걱정만이 앞선다면, 차라리 그러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마음을 들여다보면 두려움이나 불안감이 있을 것입니다. 불안이나 공포가 너무 큰 나머지 어떤 일을 행동에 옮기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인간으로서 너무 자연스러운 반응이기 때문에 옳다 그르다 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적절한 수준의 불안감이 지나치게 위험한 행동에 빠지는 걸 막아주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을 해내야 하는 상황이라면, 불안감이나 두려움 때문에 행동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다면,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과거의 사건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것은 어떤 경우일까요? 저는 제 마음이 저의 자유를 구속하는 줄 몰랐습니다.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무언가가 저의 생각과 행동을 제한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자유라는 가치에 대해 골몰하기 시작할 무렵, 과거에 겪은 어떤 사건이 트라우마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성찰적인 글쓰기를 거듭하면서 내 마음의 소리를 점점 더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일 때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때 어린 저의 장래희망은 언론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TV 화면에 나오는 것들이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고, 다큐멘터리나 시사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도 언론의 힘을 빌려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는 동경심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제 나름의 판단으로는 대학교 간판보다는 전공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신 다른 명문대에 지원을 하고, 남는 자리엔 더 안전한 곳에 지원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수는 절대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입시 결정을 내리고 버티는 와중에 학교 상담실에 불려 가게 됩니다. 그날은 S대 정시모집이 마감하는 날이었습니다. 모집 마감 시각이 아마도 16시나 17시였던 것 같습니다. 그날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상담실에 갇힌 채로 S대학교에 지원하라고 설득받았습니다. 마침내 저는 눈물을 훔치며 교무실 PC로 원서를 접수하게 됩니다. 언론과 전혀 무관한 학과였습니다. 어쩌면 그때 저의 무의식 깊숙이 다음과 같은 생각이 뿌리내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꿈을 좇는 건 부질없다.
돌이켜보니 그 사건은 19살의 어린 저에게 상처가 된 것 같습니다. 그 시절 어른들이 어떤 이유로 그러한 판단을 내렸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누구에게도 지지받지 못하고 상담실에 갇힌 10대의 제 모습을 떠올려보면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대학교에 간 이후로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이 모자라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저의 20대 전부를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장기적인 인생 목표 없이 흘려보낸 시간들이 아쉽기도 합니다.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서야 저는 그 당시의 어린 나에게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나를 성인이 되어서야 보살펴주는 일은 대단히 큰 위로가 됩니다. 누군가 진정으로 그 시절의 나를 사랑해 줄 때 비로소 현재의 나도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했던 저는 그날의 경험에 구속되어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이 얽매인 채로 살아온 것 같습니다.
앞서 수동적 자유에 대해 정의하길, 나의 통제 밖에 있는 사건이나 배경에 의해 정해진 자유를 수동적 자유라고 했습니다. 정서적 자유의 경우, 삶의 어떤 측면들을 수동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유년기나 청소년기의 경험은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환경입니다. 미성년일 때 삶의 경험은 대부분 본인의 통제력 밖에 있습니다. 어릴 적에 학습하거나 형성된 정서적 반응은 수동적인 영역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청소년기까지의 경험에 대해서는 특히 부모의 영향력이 큽니다. 여기서는 마음의 수동적 자유의 예시로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정서적 자산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흔히 수저 계급론이라고 해서, 부모의 경제적 자산 수준에 따라 자녀들의 지위를 줄 세우는 인식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자신이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면서 삶을 비관하기도 합니다. 물론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가 불행한 건 아닙니다. 반대로 금수저가 성공한 인생을 보증하지도 않습니다. 자녀가 살아가게 될 인생에 대해서 부모의 경제적 자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정서적 자산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제공하는 정서적 지원은 경제적 지원에 비해 간과되곤 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어도, 사랑받고 자란 것이 티가 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정 형편과 무관하게, 충분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은 사람들. 이들은 살아가면서 남들과 사랑을 주고받는 데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감사한 일, 다른 사람들이 잘하는 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잘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주변을 면밀하게 관찰합니다. 타인을 눈여겨보는 능력뿐만이 아니라, 그들은 표현하는 능력도 뛰어납니다. 작고 사소한 일에도 감사하다, 대단하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나 양육자로부터 고맙다, 잘했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배운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닐까요? 가정에서 물려받은 마음의 수저라고 할 만합니다.
한편 정서적 지원도 어느 정도는 물질적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가정이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특히 점점 더 어려워지는 상황에서는, 생존과 양육의 문제가 마음의 여유를 앗아 갑니다. 먹고살기 급급한 와중에 자녀에게 충분한 애정까지 쏟아주는 것은 어쩌면 대단히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힘든 와중에도 자녀들을 밝게 키워내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심이 생깁니다.
사실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 즉 부모가 가진 마음의 자산을 보여주는 일은 돈이 들어가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부모가 보여주면 아이들은 배웁니다. 정서적 자산이 상속되는 모습입니다. 정서적 자산을 상속하는 데에는 세금을 낼 필요도 없습니다. 심지어 그런 삶의 태도는 자녀에게 심어지고 나서도 부모에게 여전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돈은 상속하면서 세후 금액만 옮겨질 뿐이지만, 마음의 자산은 상속하면 배가 됩니다.
혹시 부모가 되었거나, 장래에 부모가 될 계획이 있다면, 자녀에게 얼마나 큰 정서적 자산을 상속해 줄 수 있겠습니까? 인간과 자기 자신을 혐오할 만큼 사랑이 빈곤한 자녀로 키우고 싶나요?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부모가 물려준 정서적 자원이 교육의 기회라든지, 고가의 학용품이라든지, 혹은 그 밖의 상대적 박탈감을 방지하려는 노력보다 훨씬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위와 같은 삶의 태도와 사랑스러운 인격은 자녀의 인생을 평생 따라다니는 수호천사가 되어줄 것입니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정서적인 자산은 자기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동적입니다. 한편 정서적인 역량, 즉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삶에 감사하고, 인간에게 애정을 쏟는 일 등의 능력치는 자기중심을 지키고 살아가는 데에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정서적인 영역에서 각자가 능동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수동적 자유와 달리 능동적 자유란 자기 자신이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합니다. 정서적인 차원에서의 능동적인 자유란, 감정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주인이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마음에 감정이 생겨나는 것을 방지한다거나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애당초 로봇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감정은 통제할 대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현재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분명히 알아차리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정서적으로 성숙하고 자유로운 개인일 것입니다.
마음의 주인이 되려면 앞서 말한 대로 자기감정 상태를 파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감정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일단 모든 순간 모든 감정을 알아차릴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건이나 경험을 마주할 때 정서적인 반응이 발생할 텐데, 의식하고 집중하지 않는 한 감정은 시간과 함께 흘러가고 맙니다.
이미 흘러가 버린 감정은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겠지만, 지금 이 순간 느껴지는 감정은 상대적으로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마음 챙김 명상과 같은 수련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아쉽게도 아직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공원 산책을 하다 보면 잡념이 사라지고 의식이 말똥 해질 때가 있는데, 나에겐 산책이 명상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쓰기는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들여다보는 훌륭한 방법입니다. 특히나 정서적 자유를 추구하는 데에는 자기감정을 알아차리는 능력이 꼭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내밀한 감정을 한 겹 두 겹 벗겨보면, 나 자신의 깊은 곳에 있는 욕망과 욕구를 느낄 수 있습니다. 글쓰기는 복잡하고 때로는 모순적이기도 한 마음을 정리 정돈하게 해 줍니다.
지난 여정 에피소드에서 감사일기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감사일기를 한동안 쓰다가 다른 형태의 일기를 추가하였는데, 그것은 감정일기였습니다. 주로 잠들기 전에 일과를 정리하면서 그날 겪은 일들을 떠올려 봅니다. 그러다 보면 감사할 일도 떠오르고, 실제로 감사한 마음을 느끼기도 하지만, 다른 종류의 감정을 느낀 기억이 납니다. 그 감정에 대해서 가능한 구체적이고 솔직하게 적어봅니다.
감정일기 - 두려움
감정일기 - 망설임
감정일기 - 자신감
감정일기 - 꺾이지 않는 마음
예를 들면 위와 같은 형식입니다. 나 자신을 세심하게 관찰하면 나 자신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 사람인지 자세히 배우게 됩니다. 내 감정이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나면, 요동치는 감정에 덜 휘둘리게 됩니다. 자기 이해를 키움으로써 감정의 주인이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6대 자유 영역 중에서 정서적 자유를 빼면 다섯 가지가 남습니다. 신체적 자유, 정신적 자유, 경제적 자유, 기술적 자유, 예술적 자유입니다. 신체적 자유가 정서적 자유에 미치는 영향은 지난 에피소드에서도 간단히 다루었습니다. 규칙적인 운동을 통해서 신체적 자유를 추구하다 보면, 점점 더 개선되는 신체 능력 덕분에 자기 효능감을 느끼게 됩니다. 자기 효능감이란 스스로 무언갈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일 것입니다. 적절한 자신감은 막연한 두려움이나 불안감보다 훨씬 단단합니다. 운동을 하기 전의 제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자신감에 있어서 큰 차이가 생긴 것 같습니다.
다음 에피소드에서는 정신적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정서적 자유와 정신적 자유는 구분이 미묘합니다. 정서적 자유는 오늘 이야기한 것처럼 주로 감정과 심리에 관한 영역이라면, 정신적 자유는 사고나 인지능력에 관한 영역입니다. 요즘 심리학이나 뇌 과학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는데, 그런 분야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것이 정서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