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엄마의 요양병원이야기 (2018년에 돌아가심)
아파트 단지 내 가로등이 켜질 무렵, 나만 쳐다보며 집안 이곳저곳을 꼬리 흔들며 쫄쫄 따라다니는 산이를 데리고 아파트 옆 냉천 쪽으로 걸었다. 롱패딩을 입고 걸었지만 얼굴에는 냉기가 훅 끼쳤다. 불빛에 입김이 허옇게 날린다. 저녁에는 영하 7도까지 내려가더니 냉천에는 얼음이 꽁꽁 얼어 흰 눈이 온듯하다.
밖은 얼음나라가 되어 있었지만 아파트 실내에서는 가스보일러를 켜지 않아도 춥다는 느낌이 없었다. 저녁에 가족들이 집으로 들어왔을 때도 아이들은 반팔차림이고, 난 춘추 실내복을 입는 정도다. 확실히 우리 집이 따뜻하긴 한가 보다. 우리 아파트는 건령 10년쯤 되고 겨울 일조량이 5시간 되는 동남향이다. 오전에는 환한 햇살이 평화처럼 집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래서 난방비를 아끼려고 추운 날씨를 견디는 일은 없다. 저녁에는 따뜻한 보금자리 느낌이 들도록 2시간 정도 보일러를 켜면 딸들은 덥다면서 켜지 말라고 한다. 나는 늘 창문을 닫고, 남편과 딸들은 늘 창문을 연다. 나는 그저 가족들이 하루를 직장이나 학교에서 받은 피로감을 따뜻한 곳에서 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나의 따뜻한 집에 대한 염원이 내 무의식에서 보일러를 잠시라도 켠다. 기름보일러값을 아끼려다가 뇌경색이 온 친정엄마와 어린 시절의 나에게 보상하기 위한 심리가 작용하는 걸까?
8년 전의 일이다. 이른 아침, 좀 체 내게 전화를 하지 않는 오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엄마가 쓰러져서 남해병원 응급실에 계신단다. 초겨울로 진입하던 즈음 전날 저녁, 갑작스럽게 기온이 급강하해서, 오빠가 엄마방에 보일러를 켜라고 했단다. 그런데 엄마는 침대가 따뜻하니까 아직 겨울도 아닌데 보일러를 켤 필요가 없다고 했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새벽녘에 엄마가 몸이 이상해서 저 방에서 자고 있던 오빠를 소리 쳐 불렀는데 오빠는 엄마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엄마는 왼쪽 몸이 마비가 와서 오빠를 부르려고 몸부림 치디가 침대에서 떨어진 상태로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옷에는 이미 소변이 흥건상 상태였다. 거기에다 남해병원에 이송도 이래저래 지체되었고, 남해병원에서 응급조치를 하느라 또 시간이 지체되었다. 바로 진주경상대학교 병원으로 갔어야 했는데, 오빠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마도 그전부터 뇌혈관이 조금씩 막혀 왔는데, 환절기 때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외부 한기가 들어오는 주택이다 보니 갑자기 뇌경색이 온 것 같았다. 물론 '방 온도를 따뜻하게 했다면 엄마가 쓰러지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지병을 가진 어르신들이 환절기 때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면 질환이 악화될 수 있다는 의료계의 상식 수준에서 추측할 뿐이다. 엄마가 쓰러진 그 시간부터 진주 경상대학병원에 도착하기까지 6시간이 지난 상태였다. 그곳에서는 이미 골든타임을 놓쳐서 수술도 안 된다고 했다. 엄마는 하룻밤 사이에 왼쪽 전체 편마비로 반신불수가 되었다.
엄마는 그 당시 아직 한 겨울도 아닌데, 굳이 방 난방을 켜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을 것이다. 500원 차비도 아까워 시장을 걸어다니고, 뭐든지 아끼는 엄마였으니까. 그렇게 아껴야 살 수 있었던 환경이었으니까.
침대에 전기매트를 깔고 있으니까. 만일 기름보일러값 정도는 편하게 쓸 수 있었다면 낮부터 갑자기 추워졌으니 저녁에는 난방을 켰을 수도 있다. 엄마는 따뜻한 공간을 너무 좋아하니까.
친정의 우리 집은 내가 태어난 이후로 현재 세 번째 집이다. 내가 중학교 3학년때까지 살았던 첫 번째 집은
차가 다니는 길 아래 북향집이었다. 차도에서 우리 집으로 들어가려면 살빡(집 입구 길을 어렸을 때 그렇게 불렀다.)을 지나는데 길 아래 있다 보니, 집 높이만큼 내려가는 길이었다. 그러니까 도로에서 보면 지붕이 도로 지면과 비슷한 높이였다. 그 당시에 왜 그 위치에 북향으로 집을 지었는지는 모르겠다. 북향이라 방에는 햇볕이 전혀 들지 않았다. 여름에는 그럭저럭 지냈지만 겨울에는 늘 추웠던 기억밖에 없다. 그래서 엄마나 우리 자매들은 늘 추위를 많이 탔고, 따뜻한 방을 원했다. 우리 집은 안채와 화장실 마구간이 있는 바깥채로 되어 있었고, 정작 햇볕이 비추는 곳은 마당 담벼락이었다. 그 담벼락 아래서 겨울에 식구들이 집안일이나 농사 관련 일을 했던 것 같다. 그 당시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님, 우리 형제가 2남 4녀, 아버지 형제들이 3남 3녀였는데, 장남인 아버지 동생들과 우리 6남매가 합하면 무려 16명이 방 3개인 그 집에서 나고 자라면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산업화 물결로 도시로 나갔다.
안채의 방은 2개였고, 1개는 부엌에 딸린 갓방이었는데, 아궁이 하나로 두 개의 방에 온기를 전달하는 구조였다. 그 갓방에는 온기가 거의 없었지만, 중학생이 되면서 언니와 그 방에서 잤다. 겨울에는 숨막힐정도로 무거운 이불 속에서 언니와 꼭 껴안고 잤던 기억이 남아있다. 동향으로 한 채를 더 지으려고 했는데, 나라에서 이 집 쪽으로 길이 날 거라고 하면서 못 짓게 했단다. 결국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무렵에야 흙길이 아스팔트로 바뀌면서 그 집 터는 사라졌다. 내가 어렸을 때 그 동향집이 지어졌더라면 우리 가족은 좀 더 따뜻한 공간에서 살 수 있었을까?
두 번째 집을 지어서 이사를 했는데, 어느 듯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오빠가 집으로 들어왔다. 그때부터 엄마는 냉기가 들어오는 방에 살았는데 겨울에는 방이 늘 추웠다. 현재 집은 세 번째 지은 집인데, 새 집에서 2년쯤 살았을까? 그 방에 침대를 놓았는데, 엄마는 따뜻한 방바닥이 좋다며 겨울에는 바닥에서 잠을 잤다. 엄마가 원해서 침대를 들였다기보다, 오빠가 어디서 버리는 중고 침대를 얻어다가 엄마방에 놓은 것 같았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니, 노인들은 침대보다는 차라리 침대다리가 없고, 온돌방을 느낄 수 있으면서 전자파 걱정 없는 온돌매트가 좋은 것 같다. 그것도 난방비가 거의 들지 않는 침대라면 더 좋겠다. 난방비 걱정 없이 언제든지 따뜻하게 지낼 수 있으니까. 혹시나 침대에서 낙상할 우려도 없다. 엄마가 건강했을 때도, 그런 침대가 있었는데 그런 침대를 엄마에게 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은 못 했다. 평소에 이것저것 잘 먹고, 밭에서 뭘 했다는 얘기를 들어서 굳이 침대를 바꿔줘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엄마가 만일 그냥 온돌방에서 뇌경색이 왔다면 침대에서 떨어질 일도 없었고, 기어서라도 핸드폰을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핸드폰에 단축키를 설정해 놓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식구들이 퇴근하는 저녁, 보일러를 켜면서 간호사 딸에게 말했다.
"우리가 겨울에 난방비 걱정 없이 따뜻하게 살 수 있는 것만 해도 행복한 일이야. 너희 외할머니는 난방비 아끼려다 뇌경색이 왔거든. 난 늙어서도 난방비 아끼며 살지는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