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이상한데..? 하는 의심은 생각하면 할수록 확신이 되어 갔다. 우선 내가 정지 신호(Stop) 앞을 120km/h의 속도로 달렸을 리가 없었다. 남아공 도로의 무법자, 미니버스도 그렇게는 못 달릴 거다. 그리고 지나왔던 20분 정도의 길은 60km/h 제한 속도의 꼬불꼬불 언덕길이었다. 속도를 낼래야 낼 수가 없는 구간 투성이었다. 그리고 경찰들이 내게 "못 믿겠으면교통법규를 위반한 그 장소까지 데리고 가주겠다"라고 했던 것도 이상했다.
게다가 국제운전면허(International Driver's Permit)는 남아공에서 사용이 가능한 것임에도, 이 경찰은 면허증을 받아 들자마자 No! 를 외쳤다. 이때 처음 들었던 생각은
하... 또 되는 거 안된다고 우기네.ㅠㅠ
남아공에서는 되는 것을 안된다고 했던 경우가 워낙 많았는데, 그렇게 당해놓고도 새로 당하면 그때마다 새롭다. 적응이 안된다. 남아공 정부에서 국제운전면허증을 인정한다는 증거를 찾아 보여주고 싶었지만 쉽게 찾아지지 않아 TRN을 제출했다.
TRN(Traffic Register Number)은 외국인 등록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외국인이 남아공에서 자동차를 구입할 때 미리 만들어야 하는 서류인데, 엄연히 드라이버 라이센스는 아니다. 운전면허증이라기보다는 자동차 주인이 되기 위한 임시 외국인 등록증에 가깝다.
아무튼 TRN을 확인한 경찰들은 갑자기 친절해졌다. 어디서 왔냐, 어디로 가냐, 오늘 운전을 많이 해서 피곤한 상태냐.. 등을 묻더니 앞으로 조심하라며 훈방 조치를 내렸다.
국제운전면허증보다더 면허증이 아닌 TRN을 보고 태도가 변한 것이다. 곰곰이 따져보면 TRN을 통해서 바뀐 것은 그들 마음속의 우리가 단기 여행객이었다가 남아공 거주자로 바뀐 것? 그뿐이다.
정해진 시나리오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내가 만약 TRN이 없는 보통의 외국인 관광객이었다면 어땠을까? 체포를 운운하는 진짜 경찰 앞에서 나는 당황했을 것이고 그들이 하자는 대로 따랐을 것이다. 아마 무면허 운전에 교통 신호 위반으로 겁을 주다가 현장에서 벌금(혹은 뇌물)을 받아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을지도 모른다.
남아공에는 경찰을 사칭한 강도도 있지만, 믿을 수 없는 진짜 경찰도 있다. 훈방(?)된 이후에도 이런저런 생각에 기분이 한동안 좋지 않았지만 샌프란시스베이의 하얀 등대에 도착하니 조금 숨이 트였다.
샌프란시스베이의 랜드마크, 하얀 등대. 남아공에서 두번째로 높은 등대다.
샌프란시스베이는 남아공에서 네 번째로 큰 대도시 포트엘리자베스에서 30분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조용한 백인 마을이다. 바닷가를 따라 늘어선 하얀 벽의 집들과 파란 바다가 그리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스를 가본 적은 없지만..ㅎ)
도착했을 때는 낚시하는 사람, 파도타기 하는 사람, 등대 주변에서 거니는 사람 몇 명만이 조용하게 이곳을 만끽하고 있었다. 대도시에서 가까우면서도 꽤나 멀리 벗어난 것 같은 분위기로 사랑받는 작은 마을 샌프란시스베이였다. 시끌벅적한 관광지도 없고 웅장한 무언가도 없는 곳이었지만 가든루트의 끝자락에서 잠시 숨 돌리고 가기 좋은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파도 소리와 부드러운 바람 소리에 불량 경찰 아저씨들이 준 불쾌함이 스르르 사라지는 듯했다.
힐링 포인트, 샌프란시스베이였습니다~
만약 남아공에서 렌터카 여행을 하다가 국제운전면허를 거부하는 경찰관을 만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남아공은 국제운전면허에 관한 비엔나 협약 가입국으로서, 국제운전면허증으로 남아공에서 운전을 할 수 있음은 National Road Traffic Act(우리의 도로교통법 같은 것) 제23조에 명시되어 있다. 아니라고 우기는 경찰을 만난다면 아래 링크 또는 캡처 화면을 보여주도록 하자. 그래도 말이 안 통한다면 10111나 112에 전화를 해서 도움을 구해보는 것도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