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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REview

이 세상의 모든 살리에리들에게

연극, <아마데우스>

by 모래


어린 시절, 에디슨의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완성된다"라는 말은 한동안 내게 노력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명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말속 1%의 차이가 얼마나 결정적인지를 안다. 과학적으로도 99도와 100도의 차이는 단 1도에 불과하지만, 그 차이로 물은 끓는다. 그리고 비극은 바로 그 1도에서 시작된다.



이 비극은 연극 <아마데우스>의 주인공,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삶 속에서도 반복된다.


살리에리는 신에게 헌신하며 평생을 음악에 바쳤고, 자신이야말로 신의 총애를 받은 자라고 믿었다. 그러나 궁정에서 젊은 모차르트를 마주한 순간, 그는 그 믿음이 얼마나 덧없었는지를 깨닫는다. 신이 내린 음악적 재능이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있었다는 사실은 그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이후 살리에리의 신앙은 산산조각 난다. 그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보았고, 그의 음악에 경이로움을 느끼는 동시에 질투에 잠식되어 스스로를 갉아먹기 시작한다. 그렇게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재능을 가장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자, 그로 인해 평생 고통받아야 하는 존재가 된다.


당신은 제게 타인의 재능을 알아보는 재능을 주셨네요.
그 유일한 재능으로 나는 나 자신이 영원히 평범한 인간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밤 이 도시의 어느 술집에선
그 어린아이가 깔깔대며 한 손으론 당구채를,
다른 한 손으론 생각나는 대로
음표를 써 내려가겠죠.
하지만 그 음악은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될 것이고,
내가 두 손 모아 신께 기도하며
며칠을 고쳐 쓴 음악은 한낱 쓰레기가 되겠죠.
(…)
욕망을 갖게 하셨으면 재능도 주셨어야죠.
이제부터 우린 영원한 적입니다.


그는 자신을 버린 신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신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한다. 그 복수란 바로 신이 선택한 모차르트를 파멸시키는 것. 그러나 그 복수는 곧 자신을 향한 형벌로 돌아온다.



살리에리의 절망은 비단 무대 위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빛나는 재능, 번뜩이는 천재들. 쉼 없이 반짝이던 나만의 모차르트 옆에 설 때면, 언젠가 반짝이길 바라며 쏟았던 내 노력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나는 영원히 그 빛을 돋보이게 하는 까만 배경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비참함을 지울 수 없던 밤이 있었다. 그 앞에서 '고작 이 정도'의 결과를 위해 애써온 나의 지난날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극 중 살리에리의 절규와 몸부림을 마주하면서, 관객은 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게 된다. 도달할 수 없는 재능 앞에서 느낀 좌절과 질투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감정임을 일깨운다. 연극 <아마데우스>는 천재의 그림자 속에 가려졌던 모든 이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당신이 지독한 실패를 느꼈을 때,
자비 없는 신의 조롱을 마주했을 때
내 이름을 부르세요.
안토니오 살리에리. 평범한 자들의 수호자.
내가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당신을 용서합니다.


질투와 욕망으로 얼룩진 삶 위에서도 기꺼이 평범한 자들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살리에리. 극의 마지막, 그는 마지막 독백을 내뱉곤 무대에서 내려와 조명이 꺼진 관객석으로 걸어 들어간다. 무대가 관객석으로 확장되는 그 순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살리에리의 이야기가 곧 우리 모두의 이야기임을 말이다.


다행히 오늘날 우리는 천재보다,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면서도 끝까지 본인의 길을 걸어가는 삶에 더 큰 매력을 느끼는 시대에 살고 있다. 누군가와의 비교 속에서 존재 이유를 찾기보다, 각자의 속도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시대. 비록 단 한 명의 모차르트가 될 수는 없더라도,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살리에리들에게. 나보다 빛나는 타인의 재능 앞에서도 자신만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묵묵히 걸어가기를. 연극 <아마데우스>는 그 길 위에 놓인 모든 평범한 이들을 위한 위로의 극이 된다.




해당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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