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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완 Mar 05. 2018

봄이 왔다

유희완의 그리움 散文

아무런 생각 없이 무수한 글자를 써 내려가다

멍하니 창밖을 내려다보니 낯익은 풍경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봄이 왔다.


글자를 끄적이던 종잇장을 슬그머니 쳐다보았다. 

하얀색 이면지 위로 그녀의 이름이 무질서하게 나열되어있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았던 그녀의 손은 나를 어디론가 이끌어가고

보일 듯 보이지 않았던 그녀의 표정은 나를 추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녀의 이름으로 범벅이 된 종잇장을 조심스레 펼쳐보았다.

빳빳했던 종이의 앞면에는 

그녀와 내가 일그러진 표정을 한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몇 날을 슬피 울어도

몇 해를 잊으려 발버둥을 쳐보아도

속절없는 내 마음은 스스로에게 냉혹한 벌을 줄 뿐이었다.


반쯤 감겨있는 눈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그리움이란다.

흠뻑 젖은 베개는 그녀를 만나러 가는 유일한 길이란다.


어떤 날에는 그녀에 품에 안기어 

오래도록 힘들었다며

다시는 내 곁을 떠나지 말라고 응석을 부리기도 했고

어떤 날에는 다정히 맞잡은 손 놓칠세라 

깍지를 낀 채 행복함과 두려움에 젖어있기도 했다.

이따금 미안하다며 나에게 애원하는 그녀를 만나기도 했다.

가끔은…… 

가끔씩은 나에게도 그런 날이 필요했다.


창밖을 휩쓸고 있는 빗소리가 유난히 심란했다.


비는 외로움이란다.

상처받은 영혼들의 눈물이란다.


한바탕 퍼붓고 간 창밖을 내려다보던 나의 시선은 초점을 찾지 못했다.

그저 고요한 몸짓으로 나뭇잎 사이를 흔드는 바람만을 느낄 뿐이었다.

그렇게 창밖을 바라만 보다가 거리로 나온 나는 그리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우리가 좋아했던 봄.

그녀를 떠나보낸 봄.

나를 울린 봄.

봄이 왔다.


그녀를 느끼고 그리움을 느끼며 봄을 만끽하던 시간이 지나고 곧 어둠이 찾아왔다.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거리에 쏟아지는 불빛을 밟으며 저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녀와 함께 걷던 이 길을 걸었다.

어쩌면 한 번쯤은 부딪혀보았을 법 싶은 사람들 틈에서

또 한 번 나의 그리움은 몸서리쳤다.


기다리고 있으면 올지도 모른다며

기다리고만 있으면 언젠가는 마주칠 수도 있다며 우격다짐해보았지만

오가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나는 그저 걸리적거리는 한심한 훼방꾼일 뿐이었다.


이런 날…….

그녀가 필요하다고 간절히 애원해보았지만 

어느 누구도 나의 기도소리를 들어주지 않았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처음으로 그녀를 잃어버렸던 그때의 내 가슴처럼 

시리고 차갑기만 했다.

바람소리마저 내 귓등을 울려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저만치서 나를 반겨줄 것만 같았던 그녀는 오늘도 보이지 않았다.

오지 못할 것이라고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으면서도 

집으로 돌아오는 매 순간 

나는 그런 기대를 끝끝내 접지 못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알면서도 모르는척하며 늘 똑같은 바람을 꿈꿀 뿐이었다.


비가 개인 캄캄한 하늘이 맑아 보였다.

하늘 구석구석을 훑어보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별은 보이지 않았다.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만이 

어둑한 밤의 별이 되어줄 뿐이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계절……

잠 못 이루는 계절……

다시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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