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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의 코하우징 워크숍에 참석하다②

건축 디자인 프로세스

by 킨스데이

둘째 날, 워크숍 강사인 로빈이 살고 싶은 코하우징 커뮤니티를 A4 용지에다 사인펜과 색연필로 직접 디자인해 보는 실습을 제안했습니다. 저는 지금과 달리 그 당시 에코 빌리지 커뮤니티를 만들겠다는 커다란 꿈과 목표를 가지고 워크숍에 참석한 게 아니라서 하얀 백지를 앞에 두고 턱을 괸 채 조용히 고민에 빠졌습니다. 잘 모르겠어서 우선 내가 살고 싶은 집의 조건을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숲이 있으면 좋겠지?' 집들은 프라이버시 존중을 위해 간격을 좀 띄우고. 타우랑가처럼 테라스에서 호수가 보일 수 있다면 멋질 거야. 뉴질랜드는 물가가 비싸니까 식량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채소 정원과 과일나무들을 심어보자. 주차장은 어디로 정하면 좋을까? 커뮤니티 하우스에는 어떤 기능이 필요하지? 에코빌리지에 몇 가구가 함께 살면 좋을까? 어스송 에코빌리지는 너무 큰데… 그러다가 갑자기 저의 최애 애니메이션인 "빨강머리 앤"의 초록색지붕집이 떠올랐습니다. 앤의 방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눈의 여왕'이란 이름의 사과나무, 베프 다이애나와의 약속 장소인 자작나무길, 반짝이는 호수 등등. 슥슥슥 사인펜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어느새 미래형 작은 에코빌리지 초안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디자인 실습 후에는 실제 집을 디자인하고 건축하는 과정에 대해서 로빈이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놀라웠던 점은 참석자들이 주거용 건축 자재에 대해 상당히 높은 수준의 지식을 보유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000 자재는 사용하지 않을 예정이고 친환경적인 000 소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시는데 감동이 되었습니다. 특히 시니어 부부들이 그런 경향을 보였습니다. 아마도 이 분들은 직접 집을 지은 경험이 있거나 에코빌리지 참여에 대한 니즈가 좀 더 커서 그런 것 같습니다. 건축에 1도 모르고 기껏해야 도배할 벽지나 친환경 페인트 색상을 고르는 수준의 경험이 전부였던 저로서는 이 분들의 확고한 취향과 이에 따른 지식의 깊이에 감탄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한 편으로는 이렇게 건축 자재 선정에 대한 주도권을 가질 수 있구나 하는 사실 자체가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역시 사람은 건물주가 되어야 하는 건가 봐요......)


뉴질랜드를 방문해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여기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20층짜리 고층 아파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클랜드나 웰링턴에 가도 빽빽한 고층빌딩이 별로 없어서 도시 느낌이 크게 들지 않을 수도 있는데요. 뉴질랜드는 한국 대비 인구가 1/10에 해당하는 5백만 명 수준이고 땅덩이가 우리나라 대비 2.6배로 넓기 때문에 우리처럼 고밀도 형태의 도시형 주거공간이 필요 없는 것이죠. 또한 뉴질랜드는 환태평양 조산대(Ring of Fire)에 있기 때문에 '지진'이 가장 큰 자연재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1년 크라이스처치에서 강도 6.3의 지진으로 185명의 인명피해가 있었고, 여전히 복구가 진행되고 있다고 하는데요. 또한 전문가에 따르면 50년 안에 북섬 동해안에 9.0 이상 강도높은 지진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자료 출처: https://www.yna.co.kr/view/AKR20221010051100009) 그래서 지진 위험성을 고려해 고층 건물을 세우지 않습니다. 여기선 3층짜리 집도 '아파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보통 1층이나 2층짜리 목조 주택 형태가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현지 건축가 크리스 브라우클리(Chris Brauchli)에 따르면, 목조 주택 건축을 위해 주로 사용되는 뉴질랜드산 소나무의 내구성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앞으로 작은 에코빌리지를 만들게 된다면 어떤 자재를 사용해서 집을 지어야 할지 이 부분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봐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어스송 에코빌리지 (자료출처: Cohousing for Life, illustrated by JJ)


로빈은 어스송 에코빌리지의 사례를 공유하며 "사람 중심의 디자인"을 내세워 멤버들과 함께 아래와 같이 건축 디자인 규칙을 세워 디자인 브리프를 작성했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초반에 멤버들이 다 같이 모여서 각자의 생각과 취향을 공유하는 시간을 충분히 갖으라고 강조했습니다. 당연히 의견 조율이 쉽지는 않겠지만 초반에 이런 치열하게 논의하는 시간을 충분하게 가져서 정리해야 향후 건축 디자인 설계 및 시공 과정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으며 입주 후에도 멤버의 불만 사항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스송 에코빌리지 디자인 규칙]

① 주차장은 에코빌리지 입구에 위치

멤버들이 모두 차에서 내려 걸어서 Car-free 커뮤니티 공간을 지나 집으로 가는 동선으로 확정함. 기본적으로 주차장에서 집까지, 혹은 커뮤니티 하우스에서 집까지의 거리를 70m 이내로 움직일 수 있도록 설계함. 특히 노인이나 장애가 있는 멤버의 경우, 주차장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집에 거주할 수 있도록 배려함.


보행자 도로 확보

주차장에서부터 집까지 걸어가는 통로가 커뮤니티 멤버들이 만나고 연결되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디자인함. 보행자 통로 주변에는 꽃과 식물, 나무를 심어 누구나 평화롭고 자연이 살아있는 정원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함. 또한 멤버들의 생애주기를 고려, 휠체어나 스케이트 보드 등 바퀴 달린 형태의 도구를 편리하게 사용도 가능하도록 디자인했음.


③ 모두를 위한 커뮤니티 하우스 구축

멤버들의 커뮤니티 활동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대형 공용 주방과 멤버들과 식사가 가능한 대형 테이블과 의자, 월간 회의를 할 수 있는 공간 확보, 메일함, 세탁실, 게스트룸으로 구성. 이밖에도 풀장과 사우나룸도 만들어 멤버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함.


④ 프라이버시 존중

집의 주방 창문이 보행자 도로 방향으로 나있어서 집 앞편은 커뮤니티와 연결되는 공간으로, 대신 거실 창은 집 뒤편의 프라이빗 가든이나 테라스 방향으로 설정해 집집마다 프라이버시를 존중할 수 있도록 위치와 방향을 선정함. 다시 말해서 창문은 집의 앞과 뒤에만 설치하기로 합의함. 집과 집 사이 간격은 12m~15m로 정해서 개입 공간(Personal space)를 확보하게 함.


⑤ 건축자재와 디자인의 표준화로 비용 절감

건물의 높이는 최대 2층으로 통일하고 전반적으로 친환경 건축자재(목재 등)와 디자인을 표준화해서 건축 비용을 절감하는데 기여함. 예를 들어, 어스송 바이어는 화장실 레이아웃 관련 세 가지 옵션과 2층 테라스, 아래층 화장실, 샤워기, 레인지후드 등의 옵션 여부를 제시함.


⑥ Zoning을 통해 커뮤니티 효과 극대화

영속농업(Permaculture)에서 사용하는 Zoning의 개념을 반영해 아래 사진과 같이 Zone 1(내 집과 공용 채소 정원), Zone 2(내 집 주변 이웃 클러스터 포함 6~8 가구), Zone 3(어스송 에코빌리지 커뮤니티 전체로 커뮤니티 하우스 관리, 정원, 커뮤니티 행사 등 공공공간까지 포함된 개념), Zone 4(에코빌리지 인근 도로, 지역 도서관, 상점, 커뮤니티 시설 등 포함)로 구분하고 Zone 별로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구분해 원활하게 에코빌리지 커뮤니티가 운영될 수 있도록 함.


어스송 에코빌리지 Zoning (자료 출처: Auckland Council)


로빈은 에코빌리지 커뮤니티를 만들려면 기본 15-30 가구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사이즈가 작은 경우, 소통은 원활할 수 있는 반면, 개개인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는데 이때 각자 자기의 역할과 책임을 잘 수행하면 다행이지만 그러다가 한 두 사람이 빠지게 되면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운영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3~4 가구로 구성된 작은 에코빌리지를 생각하고 있어서 이 부분은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초심을 잃을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오히려 느슨한 커뮤니티가 되도록 시작부터 작게 세팅을 하고 커뮤니티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지만 각자의 역할과 책임은 명확하게,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익이 있다면 기여도에 따라 수익 분배를 한다는 등 규칙을 명확하게 하고 서명을 받는 형식으로 진행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어스송 에코빌리지가 어떻게 환경적으로 지속가능성을 추구했는지에 대해서 좀 더 깊이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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