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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Nov 05. 2024

프리랜서 디자이너, 강박에서 벗어나기

나만의 엣지를 찾아서


A업체 표지 시안 이메일 보내기

B업체 패키지 수정 작업

C업체 표지 수정 작업

A업체 본문 시안 작업 (2/3)

어도비 구독 결제 갱신 확인

D업체 표지 스케치 초안 잡기


프리랜서에게도 월요일은 다른 날보다 더 분주한 날이다. 매일매일 해야 하는 일 외에도 한주의 큰 일정들을 다시 한번 체크하고, 전체적으로 스케줄 및 작업일정을 조율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예상치 못한 변수는 늘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만큼은 늘 스케줄을 관리한다.

이날도 어김없이 갑자기 들어온 변수(인쇄 추가 발주 건) 때문에 업체와 연락하고 일정 조율하느라 결국 일부는 끝내지 못했다.




강박에서 벗어나기

모닝페이지를 쓰다 보면 나는 늘 마지막엔 다짐하는 글로 마무리를 하게 된다. 오늘 마무리 글은 이랬다.


“‘완벽’을 추구하다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는 것보다, 엉성하더라도 매일(자주) 남기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다는 걸 절대 잊지 말자. (…) 그리고 나는 지금 무엇보다 작업의 모든 것을 전부 다 새롭게만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디자인을 업으로 하는 나는 글쓰기(기록)에 대한 욕구가 디자인만큼이나 높은 편이다. 그래서 어설프지만 실제 출간을 해보기도 했다. 그 덕에 칭찬을 받기도 했지만, 반대로 낮은 평점에 주눅 들기도 했다.(이제는 무관심이 가장 큰 악평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쓰고 싶은 마음은 늘 갖고 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아직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언가가 뚜렷이 보일 때까지 마냥 기다리다가 수년을 그냥 흘려보냈다. 이제야 정신을 차려본다. 그리고 그때의 경험을 교훈 삼아 블로그든, 브런치든 꾸준히 작게라도 기록을 이어가야겠다고 다짐, 또 다짐했다. (고민하기 전에, 일단 닥치고 책상 앞으로!)


‘뚜렷이 보일 때까지 마냥 기다리기’는 결국, ‘완벽’을 추구하다가 저지르는 가장 흔한 실수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오히려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꼴. 이는 글쓰기뿐만 아니라 나의 일, 그러니까 디자인에 있어서도 빈번히 발생하곤 한다.


그러고 보면 최근 몇 달간, 나는 계속해서 ‘강박’ 속에 스스로를 몰아넣고 있었다. 실제로 진행 중인 일을 예로 들어보자면,


디자인 시안을 작업하다 보면, 가끔 내가 생산해내지 못하는 스톡 이미지 혹은 그래픽 소스들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런 이미지와 소스들을 가져다 쓴다고 해서 디자인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모든 재료들을 일단 배제하고는, ‘나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해 전에 없는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어야 해!’라는 고집스러운 생각에 사로잡혀 자꾸만 스스로를 옥죄고 있었다. 마치 내가 직접 재배할 수도 없는 귀한 재료들을 하나하나 일일이 어떻게든 키워 수확을 내려고 이리저리 고군분투하는듯한 느낌.


아... 내가 무슨 천재도 아니고.


같은 재료를 활용해도 수십 가지의 요리를 만들어낼 수 있듯이, 적재적소의 상황에 소스(재료)를 활용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디자이너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각자 재능이 다르고 능력이 다를 뿐, 가능한 재료를 가지고 어떻게 요리해내느냐에 따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게 디자이너에게 더 중요한 것이다.  


그래, 100% 창조란 있을 수 없는데,

그동안 내가 나를 너무 몰아세웠구나.


좋게 말하면 ‘완벽’이지만 사실은 모두 ‘강박’에 가까운 일들. 큰 의미에서 보면 모든 직업이 다 그렇겠지만 특히 창조적인 일을 하는 디자이너에게, 무엇보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증명해 내야 하는 프리랜서에게는 이러한 강박으로부터 벗어나는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끊임없이 창조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텅 빈 컵으로 물을 부을 수는 없어요. 노트와 펜을 들고 생각을 정리하면서 보낸 며칠은 이메일에 답장하느라 바쁘게 보낸 며칠보다 장기적인 차원에서 더 의미 있고 생산적일 수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의 목록에 둘러싸이느라 스스로를 속이지 마세요. <솔로워커: 미치지 않고 혼자 일하는 법>


지금과는 또 다른 방향으로 한참을 고민하던 프리랜서 5-6년 차 즈음에 열심히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던 책에는 위와 같은 문장이 있다. 그 당시 내가 이 책을 읽고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이메일 알람 끄기’였다. 한때 밤낮이고 새벽이고 오는 메일 알람에 신경을 곤두세워 스트레스받던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때는 왜 알람 끌 생각을 못 했었는지. 설령 클라이언트가 새벽에 이메일을 보내왔더라도 내가 그 새벽에 바로 답장할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알고 보면 이것 또한 강박이었다.

 

바로바로 확인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던 지난날. 과감히 알람을 끄고 나서야, 나는 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클라이언트로부터 휘둘리기 시작하면 이 험난한 프리랜서 생활을 오래 지속하기 힘들다는 것도 이 즈음에 알게 되었다.


클라이언트와 오래오래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런 ’이메일 알람 끄기‘ 같은 사소한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유연해져야 한다. 클라이언트를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스스로 유연해지게 되면, 클라이언트가 달리 보인다는 사실! ‘왜 클라이언트는 시도 때도 없이 메일을 보내는 거야’ 하는 생각은 사라지고, “지난밤 주신 메일은 잘 확인했습니다. 늦게까지 업무 보시느라 너무 고생하셨을 텐데, 서둘러 진행해 보겠습니다. “ 하는 친절의 말이 먼저 나오게 되었다.


결국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내가 하는 디자인 또한 100% 창조라는 게 없다는 사실을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비로소 스스로 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진입로에 들어서게 된다. 그렇게 진입로에 들어선 다음부터 해야 할 일은, 그 안에서 나만의 엣지를 만들어나갈 수 있도록 꾸준히, 그리고 끊임없이 노력해 나가는 일이다.


등산로에서 이탈했다고 산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당신은 그 산을 오를 수 있다. 기억하기 바란다. 두려움 대신 가치를 선택할 기회는 언제나 있다. <불안한 완벽주의자를 위한 책>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혹시라도 중간에 진입로를 벗어나더라도 길은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믿는 것. 등산로에서 이탈했다고 산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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