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관광객, 때로는 런더너가 되어.
여행 4일 차, 숙소 주변인 켄싱턴 지역에서부터 메릴본 스트리트 중심 곳곳을 온종일 돌아다니기로 한 날이었다. 디테일한 계획 일정은 아니어서 분명 변동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우리는 반나절 이상을 메릴본 스트리트에서 보내게 되었다.
드라마를 자주 보는 편은 아니지만 혹여나 보게 되더라도 본방송으로 보지 지난 방송을 일부러 다시 찾아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그런 내가 유일하게 챙겨본 드라마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셜록 시리즈!
소위 ‘잘생김을 연기한다’는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하는 셜록은 그야말로 매력이 흘러넘쳤다. 때로는 셜록으로, 때로는 빈센트로(다큐멘터리 영화「반 고흐: 페인티드 위드 워즈」에서 그는 빈센트 역할을 맡았다.), 때로는 마법사로(마블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셜록의 배경지인 셜록 홈즈 박물관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튜브를 타고 이동하는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모습을 여행 중 우연히 보았다는 어느 여행자의 글을 보고 ‘혹시 나도 마주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기기도 했다. 아무튼 나는 원작 소설 속 ‘셜록’이 아닌, 드라마 속 ‘셜록(정확히는 베네딕트 컴버배치)’을 떠올리며 베이커 스트리트 221번가로 향했다.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앞을 지나 베이커가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20여 분을 달려 도착한 셜록 홈즈 박물관. 소설 속에만 존재했던 가상의 장소를 1930년도에 재정비해 실존하는 곳으로 만들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입장료가 1인당 15파운드나 하는 박물관은 관람하지 않는 대신 우리는 무료로 마음껏 구경할 수 있는 기념품숍에 들어가 기분을 내기로 했다.
그런 면에서 기념품숍은 언제나 그렇듯, 늘 기분 좋은 곳이다. 꼭 무언가를 사지 않아도 구경하는 것으로 충분히 재미있는 곳이니까. 숍 안에는 ‘셜록’과 연관된 거의 모든 것들이 상품으로 만들어져 우리의 눈을 사로잡았다. 모자에서부터 성냥갑, 배지, 액자, 각종 문구류….
하지만 마땅히 손이 가는 기념품은 딱히 없었다. 그중 만만한 열쇠고리라도 사볼까 했지만, 무턱대고 샀다간 걸어둘 열쇠도 없는데 언젠가 결국 책상 서랍장 안에 처박혀 서서히 잊힐 것이 뻔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뭐라도 사 가야겠다는 심정으로 사방에 놓인 기념품들을 들었다 놨다 반복하고 있을 때 남편이 무언가를 들고 오며 말했다.
“이거 하나만 사자”
“뭔데?”
남편 손에 들려있는 건 이곳 주소를 나타내는 실제와 똑같이 만든 작은 크기의 철제 간판이었다. 처음엔 이런 걸 어디다 쓰냐며 들은 체도 하지 않았지만, 생각해보니 기념품은 말 그대로 기념품이 아니던가. 결국 내내 고민했던 기념품은 철제 간판 하나를 사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진짜 셜록은 만나지 못했지만.
셜록 홈즈 박물관에서부터 메릴본 거리를 중심으로 쭉 걸어 내려오니 빼곡하게 이어진 여러 상점들 사이에 돈트 북스가 보였다. 여행 매거진 「론리플래닛」에서 ‘세계의 아름다운 10대 서점’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한 곳.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직접 보기 위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고풍스러운 서점 문을 통과하니 영화 속에나 나올법한 옛 서점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왜 세계의 아름다운 서점에 선정되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예쁘다’라는 말을 연신 내뱉으며 서점 곳곳을 둘러보았다.
가사 없는 잔잔한 배경음악이 흐르는 서점 안은 책 넘기는 소리, 사람들의 발소리, 이층으로 올라가는 오래된 나무 계단의 삐걱거리는 소리 외엔 별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서점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책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철저히 관광객 차림이었던 나는 이 아름다운 서점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에 카메라 셔터를 몇 번 누르다가, 혹시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대부분 매끄러운 종이를 사용하는 우리나라 책들과 달리 재생지 같은 가벼운 종이를 많이 사용하는 외국의 책들은 확실히 느낌부터 달랐다. ‘소장’에 좀 더 의미를 두는 우리나라와 달리, 들고 다니며 읽기 편하도록 가볍게 만들기 위해 ‘실용성’에 초점을 맞춰서일까?
나는 디자인 작업을 위해 주기적으로 서점에 들른다. 디자인 영감을 가장 잘 얻을 수 있는 곳으로 이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수백 페이지에 이르는 내용을 압축해서 하나의 이미지와 제목으로 표현해 그 내용을 짐작해볼 수 있게 만드는 일. 비단 표지 디자인뿐만 아니라 내가 하는 모든 디자인의 결과물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중에서도 고난도의 작업이 바로 북 디자인이 아닐까?
수백수천 권에 달하는 표지를 보며 나라면 어떻게 풀어낼까 고민해 보기도 하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뛰어난 표지 디자인을 볼 때면 감탄하며 배우기도 한다. 그리고 책 표지에서부터 본문, 종이 질감, 모양, 색깔 등을 한참 구경하다가 서점을 떠날 때 늘 책 한 권을 꼭 사서 나온다. 수많은 책을 다양하게 구경한 것에 대한, 그리고 책 덕분에 이런저런 영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한 일종의 감사의 표현이다.
비록 이곳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은 없었지만 나는 이 아름다운 서점을 향한 감사의 표현을 해야 했다. 한참을 둘러본 나는 아동서적 코너에 있던 내 수준에 맞는 자그마한 팝업북 한 권을 들고 카운터로 가서 앞사람의 계산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책을 한가득 산 앞사람에게 직원은 서점 이름이 새겨진 에코백에 책을 가득 담아 건네주었다. 구입한 책의 양을 보니 앞사람은 아마도 이곳에 사는 현지인인 듯했다.
나는 책을 사면 에코백에 그냥 담아주는 건가 싶어 앞사람이 구매한 책들과 내가 들고 있는 책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하지만 겨우 손바닥만 한 책 한 권으로는 그냥 담아줄 리 없을 것 같았다. 어느새 내 차례가 다가왔고, 나는 쭈뼛거리며 에코백을 함께 구매하고 싶다고 직원에게 말을 건넸다.
직원은 나처럼 에코백을 구매하는 관광객들을 수없이 만난 듯 자연스럽게 에코백 2종을 꺼내 보이며 각각의 금액을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나는 욕심부려 2종을 모두 구매했다. 결국 책 한 권 값보다 더 많은 금액을 에코백 사는 데 냈지만, 이렇게라도 이 아름다운 서점을 구경했던 것에 대한 감사 표시를 할 수 있어서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서점에서 나왔을 땐 이미 두시가 훌쩍 지나있었다. 원래는 이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애프터눈 티를 마시러 갈 계획이었으나, 그러기엔 시간이 애매할 것 같았다. 가려고 한 레스토랑의 애프터눈 티 마감 시간은 4시 반이었기 때문이다. 점심이냐 애프터눈 티냐 둥 중 한 가지만 선택한다면, 애프터눈 티. 결국 우리는 점심도 거른 채, 곧바로 애프터눈 티를 마시러 가는 웃픈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차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 애프터눈 티를 즐긴다는 영국인들의 문화를 이번 여행에서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다. 단순히 홍차와 디저트 맛을 본다기보다는 이들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는 그 시간을 내 시간 속에도 녹여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서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월리스 컬렉션’에 도착했다. 높은 유리 천장에서 떨어지는 햇살이 핑크빛 벽에 떨어지며 갖은 모양을 내고 있었다. 곳곳에 큼직한 나무들 때문인지 마치 온실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자리에 앉아 애프터눈 티 세트와 크림 티를 주문했다.
얼마 뒤 직원은 묵직한 무쇠 티포트와 따뜻하게 데운 우유가 담긴 작은 저그를 함께 내어주며 티를 우려내는 방법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웬 우유지? 고개를 갸우뚱하는 내게 남편은 홍차에 우유를 섞은 게 밀크티이지 않냐며 우리나라 캔 음료 ‘데자와’를 언급했다.
“데자와 몰라? 안 마셔봤어?”
“알긴 알지. 그런데 한 번도 안 마셔봤어.”
가던 데만 가고, 먹던 것만 먹는 익숙함을 더 쫓는 내가 ‘데자와’를 한 번도 마셔보지 않았다는 사실은 내게 그리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캔에 그려진 이미지만 봐서는 도대체 무슨 맛인지 가늠할 수 없게 생긴 데자와는… 처음 봤을 때부터 그냥 왠지 맛없을 것 같은 느낌?(어디까지나 나의 개인 취향)
첫인상이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이미지가 굳어져 굳이 마시지 않았을 뿐인데 남편은 그런 나를 보고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처음 맛본 밀크티는 달콤하면서 쌉싸름했다(밀크티의 이 오묘하면서도 달콤한 맛을 데자와 캔 디자인에 담아낼 수 없었을까?). 아무튼, 익숙함을 깨고 새롭게 다가오는 감동은 몇 배가 되기도 한다.
충격 속에 밀크티를 홀짝이고 있을 때 애프터눈 티 세트의 꽃인 디저트가 나왔다. 3층짜리 트레이에는 샌드위치, 스콘, 조각 케이크가 차례대로 담겨 있었다. 정사각형 모양의 2인 테이블 위가 순식간에 빼곡해졌다. 먹어본 사람은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던 스콘 그리고 함께 나온 클로티드 크림의 맛은 말할 것도 없었고 샌드위치며 케이크까지 풍성하고 달콤한 디저트들이 홍차와 함께 어우러져 입안을 풍성하게 가득 채워주었다.
신기해서 두리번거리는 눈빛, 묵직한 카메라. 우리는 누가 봐도 관광객이었지만 티타임을 즐기는 이 순간만큼은 관광객이 아닌 현지인이 되고 싶었다. 천천히 흐르는 시간에 분위기가 더해져 빛을 발하는 홍차의 매력에 취해 카페 마감 시간이 될 때까지 그 시간을 마음껏 즐겼다.
이번 편에서는
여행자들이 많이 가는 곳들을 다니며
철저하게 관광객의 모습이었다가
잠시 잠깐 런더너가 되어보기도 했던 곳에서의
세 가지 추억을 옮겨보았습니다.
끼니도 건너뛰고 애프터눈 티를 즐겨야 했던
서툰 여행자의 모습이 조금은 부끄럽지만,
그 순간만큼은 런더너가 된 기분이었는데요.
그때의 생동감이,
있는 그대로 잘 전달되었길 바랍니다.
온라인으로 다 담지 못한 이야기들,
책으로도 저의 이야기를 만나주세요 :)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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