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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닥 Dec 20. 2021

오늘 방 보러 가도 될까요?

디자이너가 살았던 집에 디자이너가 들어가다.

조급 또 조급! 조급함이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다음 날 아침 9시에 맞춰뒀던 아이폰의 기본 알람이 울린다. 9시는 너무 이르겠지 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20분 뒤에 일어나서 전화를 건다. 받지 않는다. 더 자야 하나 생각하는 찰나에 문자가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매물 보시는 거 가능합니다. 점심 이후로 와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사실 1시에 지인 결혼식이 있다. 그래서 3시 이후가 가장 좋은 시간이다.

하지만 누군가 나보다 일찍 올까 노심초사했다. 내가 첫 번째 손님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오후 2시 30분으로 약속을 잡았다.


지인의 결혼식에 온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인은 마치 공주님 같았고, 식사 또한 스테이크가 코스요리로 나오는 고급스러운 호텔 결혼식이었다. 하지만 만끽할 틈도 없이 시간은 금세 1시 50분이 되었다. 조금 늦을 것 같아서 현 세입자에게 2시 40분까지 가겠다고 했다.


신랑 신부와 친구들이 사진을 찍는 시간이 되었고, 얼굴이 익숙한 반가운 사람들과 함께 사진을 찍다 보니 생각보다 늦어져 2시 10분에 인사하고 황급히 나왔다. 30분 만에 매물을 보러 이동해야 했다.

불가능하다. 세입자는 3시에 집을 보러 올 사람이 있으니 최대한 일찍 와달라고 한다.


날아갈 수도 없는 나는 마침 그 동네에서 놀고 있는 애인에게 부탁했다. 현 세입자에게 말해놓을 테니 집 설명 좀 듣고 있어달라고 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서 보기로 한 집까지 뛰어갔다. 숨이 가쁜 채로 방을 요리조리 둘러봤다. 내가 반했던 매물 사진과 실체가 비슷했다.

무엇보다 해가 잘 들고, 자그마한 테라스가 있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혼자 살기 적당히 좋을 것 같았다. 번화가의 살짝 중심이다 보니 장단점이 있을 수 있다. 장점은 나가면 바로 핫한 카페, 맛집을 갈 수 있다. 단점은 주말엔 유동인구가 많아 살짝 시끄러울 수 있다.


건물은 구옥이지만 옥색 몰딩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때는 콩깍지가 씌어서 못 봤다. 싱크대 하단에 연식을 드러내는 듯한 옥색 몰딩이 있다. (이후 애인이 말해줘서 알았다.) 그 정도는 내가 눈을 흐리게 뜨면 되는 것이다.


사실 이 집이 더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여기 사는 주인이 취향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처음 집 사진을 봤을 때 한눈에 알아봤다. B매거진, 바이레도, 르라보, 제네바 등 여러 소품과 브랜드들로 미뤄보았을 때 이 '방 주인은 취향 있는 사람이다. 디자이너일 것이다.'라는 가설을 세웠다.

가설은 맞았다. '우리도 디자이너예요. 사진 보고 딱 알았다'라고 주접을 떨며 반갑게 이야기를 나눴다.


짧고 굵게 15분 정도 봤을까.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음 사람을 생각해서 1층으로 내려왔다. 바깥에는 집주인 건물주 할머니가 박스를 줍고 계셨다. 건물주도 박스를 줍다니. 집주인 할머니한테 다가가서 집 보러 온 사람들이라고 신분을 밝혔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금액조정을 부탁했다. 조정은 어렵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정도 위치에 이 정도 면적이면 괜찮게 나온 집인 걸 나도 안다.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애인의 친구가


"어떤 사람 또 들어간 것 같아"라고 말했다.


평소 경쟁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의 소유자인 나는 이번만큼은 경쟁심을 발휘해 보았다.


"나 계약할래."


건물주님께 계약 의사를 말했다. 현 세입자님을 데려오라고 하셔서 전화를 걸어서 계약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 집 보고 계시는 분이 있는데 어떻게 말씀드리지." 하며 난처해했다.

평소 배려심이 많은 성격의 나는 아무 타격도 입지 않기 위해 이번만큼은 배려심을 소멸시켜 보았다.


건물주님은 나이가 지긋하신 할머니이다. 현 세입자에게 대신 계약서를 쓰고 가계약금을 받기로 했다. 건물주님께서는 내가 조용히 잘 살 것 같다며 좋아하셨다. 세입자 면접에 합격한 것이다.


계약서를 작성할 A4용지와 펜을 못 찾아서 현 세입자분이 스케치북 종이에 입시 때 썼다는 색연필을 꾹 눌러 수기로 문서를 작성했다.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계약서의 탄생이다.

내가 가진 현금 전부를 털어 가계약금을 이체했다. 이제 이 집 아무한테도 못 넘긴다는 의미였다.


다음 순서는 입주 날짜를 조율하는 것이다.

시기는 상관없었다. 내년 1월쯤이겠거니 했다. 현 세입자는 이번 달까지 집을 정리하고 싶어 했다. 입주일이 12/1이 됐다. 계약하고 나와서 보니 당장 열흘 남짓한 시간이 남았다. 살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보증금은 어떻게 구하지? 내 돈은 지금 마이너스 상태인 주식에 꼬라박아 없는데..?"


그렇게 열흘 안에 보증금 삼천만 원 마련하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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