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치 캡슐

by 김 몽

1장.


지구는 24세기, 외계 문명과 교류가 시작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시대.

인간의 창작물은 더 이상 물리적 기록이 아니라 '캐치 캡슐'이라는 형태로 저장되고 거래된다.

모든 예술, 과학, 기술은 뇌에 각인된 형태로 순수히 존재한다.


그들은 조용히 도착했다.

거대한 우주선도 없었고, 천둥 같은 소리도 없었다.


사람들은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다. 단지 어쩐지 마음이 허전해지는 날이 늘었을 뿐이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던 창작의 열기,

누군가를 사랑하던 순수한 감정,

혼자라도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혁명의 신념이 시들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스캐버스'라 불렸다.

신선한 인간의 사상과 감성을 채취하기 위해 지구에 온 존재들.

사람들 사이를 자유롭게 떠돌며, 갓 피어난 생각을 탐지하고, 그 자리에서 스캔했다.


스캐버스에게 중요한 건 '기성품'이 아니었다.

책으로 출판된 사상, 영상으로 저장된 감정은 이미 늙고, 굳어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마음속에서 이제 막 움튼, 세상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최초의 불꽃'이었다.


그들의 스캐너는 이 불꽃을 포착했다.

어떤 젊은 시인이 새벽녘에 처음 떠올린 시구를,

어떤 과학자가 꿈속에서 얻은 혁신적인 공식을,

어떤 소녀가 첫사랑에 빠지며 느낀 미묘한 전율을.


스캔된 감성은 투명한 캐치 캡슐 안에 저장되었고,

스캐버스는 그것을 자신들의 문명으로 가져갔다.

거기서 인간의 사상과 감정은 새로운 형태로 재조합되어,

그들의 노래가 되었고, 그들의 예술이 되었고, 그들의 신화가 되었다.



2장.


도시는 죽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크레디트 장터'로 몰려갔다.

어린 시절, 강가를 뛰놀던 기억은 20 크레디트.

첫사랑을 바라보던 따뜻한 오후는 50 크레디트.

엄마의 품에 안겨 울던 기억은...

값을 매길 수 없었다.


"이 기억은 절대 팔지 마세요, "

노인은 말했다.

"이건, 당신의 마지막 영혼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돈이 필요했다.

스캐버스는 조용히 스캐너를 꺼냈다.

파란빛이 이마에 닿았다.


그리고 따스했던 그날 오후는, 영원히 사라졌다.



3장.


"우린 도둑이 아니다 "

스캐버스의 한 대표가 기자 회견에서 말했다.

"우리는 생명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구하는 수호자다."


그러나 인간들은 반박했다.

"그건 강탈이다. 우리의 혼을, 아직 세상에 보여주지도 못한 혼을 훔쳐 간 것!"


이윽고 세계 정부는 스캐너 사용을 금지하고, 스캐버스를 적으로 규정했다.

도시 곳곳에 '정신 방패 장치'가 설치되고,

특정 파장에 민감한 인공 뇌파 장벽이 가동됐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가장 빛나던 아이디어들은, 가장 뜨겁던 감정들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예술은 무뎌지고, 과학은 반복되기 시작했다.

사랑은 습관이 되었고, 혁명은 사라졌다.



4장.


스캐버스 족은 인류의 문명을 통째로 섭렵함과 동시에 인간들의 창의성까지 섭렵함으로써, 지구와 똑같은 행성을 만들어낸다. 이로 인해 지구를 카피한 행성이 태양계의 지구 반대편에 공존하며 실시간으로 동일한 문명을 생산하며 존재한다.

몇 차례의 행성 간 전쟁에 의해 세계우주 질서가 재편될 무렵, 어떤 행성이 진짜 지구이냐에 대한 온갖 억측과 가설이 난무하여 '어떤 행성이 원조 지구인가?'에 대한 지적 소유권 분쟁이 일어나게 된다.


이에 세계 정부는 스스로 오리지널 지구임을 증빙하고 카피된 지구와 차별화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하는데...



5장.


마침내 세계 정부는 비밀요원을 선발하여 한 임무를 부여하게 된다.

타임캡슐을 타고 인간의 순수성과 창의성이 서서히 위협받기 시작한 2025년 지구로 다시 돌아가

지구의 창의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다.


앞으로 민둥산이 될 인간의 뇌에,

뿌리 깊은 창조의 씨앗이

더욱 깊숙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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