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와 익숙함 사이, 흙신의 '승리 방정식'
매년 8월 13일은 세계 왼손잡이의 날입니다. 영어로는 International Left Handers Day이고, 이날에 뭘 하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참고로 저는 하루 빠른 12일이 생일이고 왼발잡이입니다.
세계 인구의 10%가 왼손잡이라고 하는데요, 그중에 위대한 왼손잡이들이 있습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IT업계만 하더라도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마크 주커버그가 왼손잡이라고 하네요. 버락 오바마, 폴 매카트니,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 역시 왼손잡이입니다! 모두 다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인물들인데요, 7억만 왼손잡이 분들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왼손잡이는 바로 이적도 류현진*도 아닌 테니스 선수 '라파엘 나달'입니다.
*참고로 류현진 선수는 사실 왼손잡이가 아닙니다. 좌투우타에서 알 수 있듯 원래 오른손잡이지만 어렸을 적 아버지로부터 왼손잡이용 야구 글러브를 선물 받은 후 그때부터 왼손으로 쭉 투구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나달은 사실 오른손잡이였습니다. 어릴 적 힘이 약해서 테니스를 칠 때 포핸드와 백핸드 스윙을 모두 양손으로 치던 버릇이 지금의 강력하고 정교한 양손 오른 속 백핸드를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12살 때까지 나달에게 포핸드는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테니스에서 포핸드는 공격을, 백핸드는 수비를 뜻합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선수들이 이 방식을 사용하며, 이 두 가지를 적절히 배합하여 네트 맞은편 상대와 승부를 이어갑니다. 물론 페더러라는 예외는 항상 존재합니다. 페더러의 원핸드 백핸드는 그 어떤 공격보다 정확하고 날카롭습니다. 다른 선수들이 백핸드로 상대의 공을 넘기기 급급할 때 나달은 철벽 같은 수비를 해냄과 동시에 상대방에게 날카로운 공격을 선사합니다. 어릴 적 자신의 약점에 낙담하지 않고 기본기를 다지고, 이것을 자신의 무기로 만들었습니다. 특유의 활동량과 빠른 스피드로 백핸드로 오는 공의 위치를 잡고 어렸을 적부터 단련해온 오른쪽 양손 백핸드로 파워풀하게 공을 받아내죠.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꾼 나달의 생존 전략이 지금의 ATP 랭킹 1위를 있게 했습니다.
흙 신, 왼손 장인, ATP 랭킹 1위에 빛나는 나달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어쩌면 그의 겸손함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달은 코트 위에서 라켓을 집어던지거나 상대방을 도발하는 행위를 하지 않기로 유명합니다. 열정적이고 화끈한 그의 플레이 스타일과 더불어 항상 매너 있는 플레이와 애티튜드로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고 있습니다.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 이 세명은 실력뿐만 아니라 각자의 개성 강하면서도 인격적으로도 뛰어나기 때문에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것 같습니다. 나달은 특히 자신보다 랭킹이 낮거나 평소 유명하지 않은 선수에게 패배했을 때도 늘 상대방을 존중하고, 경기 후 인터뷰에서도 자신의 부상이라던지 건강에 대한 질문 외에 상대 선수의 플레이를 칭찬하고 좋은 경기였음을 강조하곤 합니다.
나달의 자서전에 의하면 14세 당시 나달은 해외에서 열린 주니어대회에서 우승 후 스페인으로 귀국했는데요. 축하 파티를 즐길 겨를도 없이 바로 다음날 아침 9시에 훈련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일부러 거친 코트와 낡은 공 등 좋지 않은 환경에서 훈련을 했다고 하는데요. 이러한 훈련 환경 덕분인지 나달은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인 지금까지도 클레이코트의 황제, 흙신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시 나달의 코치는 나달의 삼촌인 '토니 나달'이었는데요, 테니스의 '기본기'와 '예절'을 그 무엇보다 중요시했다고 합니다. 넉넉하게 테니스를 즐기지 못하는 다른 이들을 생각하며 라켓을 던지는 행위를 금지하고 공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을 먼저 가르쳤다고 합니다.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라켓이나 공과 같은 다른 외부 요소가 아닌 오직 나 자신의 실력뿐이라고 생각했다고 하네요. 리스펙-!
부상 탓, 장비 탓, 남 탓, 클라이언트 탓, 회사 탓... 남 탓하지 않는 디자이너가 되어야겠습니다.
"나달은 플레이 스타일 상 롱런할 수 없다. 전성기가 지나면 금방 내리막길을 타 조기 은퇴할 것이다."
"나달은 훗날 그의 몸이 감당해낼 수 없는 엄청난 양의 수표를 발행하고 있다"
2005년 당시 미국 테니스의 전설 안드레 애거시가 나달에 대한 의미심장한 예언을 남겼습니다. 엄청난 활동량과 운동능력 위주의 나달의 플레이 스타일 때문에 롱런하지 못할 것이라는 당시의 평가를 비웃기라도 하듯 14년이 지난 지금(2018년 10월 1일, 커리어 통산 클레이코트 승률 92% 415승 46패)의 랭킹 1위는 라파엘 나달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건지... 답은 라파엘 나달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커리어 사이사이에 심각한 부상과 후유증으로 잠시 폼이 떨어진 적은 있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최고의 플레이로 보여주던 나달. 부상으로 재활과 휴식을 거친 뒤, 놀랍도록 진화하여 돌아오던 라파엘 나달. 그 화려함 뒤에 꾸준한 노력과 그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는 강인함이 엿보입니다. 다른 선수들이 나달의 스피드와 활동량을 의식할 때 꾸준히 근력을 키워 파워를 장착했고, 베이스라인을 지배하며 코트 곳곳에 발자국을 남기며 체력에 의지하던 스타일에 과감하고 정교한 네트 플레이를 장착하자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랭킹 1위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20대 한창이던 시절 갖지 못했던 기술을 갈고닦아 테니스 선수로써 전성기가 지난 시점인 지금,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플레이어가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에 변화를 주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또 그 결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나가는 과정 역시나...
포기를 모르는 끝없는 노력. 스포츠에서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덕목 아닐까요. 정말 본받을게 너무나 많은 라파엘 나달 선수입니다.
Routine.
루틴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으로 쓰일 때가 많습니다. 판에 박힌 일상처럼 반복되는 일을 칭하기도 하는데요. 나달에게 루틴이란... 테니스 경기를 하는 데 있어 일종의 의식(ritual)과도 같습니다.
나달 선수가 경기 중 서브를 넣을 때면 꼭 이렇게 몸과 얼굴을 더듬더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손이 참 바쁘죠? 유독 스포츠 선수들 중에서 이런 루틴을 갖고 있는 선수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테니스나 야구처럼 잠깐의 대기시간이 있는 경우 이렇게 습관적으로 행동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KBO 리그에서는 삼성 라이온즈의 박한이 선수가 타석에서의 루틴으로 유명하죠.
이 뿐만 아니라 나달 선수는 코트의 라인을 밟지 않는다던가, 경기중 마시는 물병이 가지런히 그리고 상표명이 정면에 놓이도록 바르게 배치한다던가 하는 사적인 습관이 있습니다. 개인의 징크스 때문에 생겨났을 이런 루틴 때문에 경기중 재밌는 장면도 연출됩니다.
경기 중 나달 선수 벤치의 물병이 쓰러지자 이를 의식한 듯 볼보이가 후다닥 달려가 물병을 제자리에 놓는 모습이 포착됐는데요. 나달 선수도 웃네요! 바뀔 만도 한데 이런 걸 보면 사람은 참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플레이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자신만의 습관, 자신만의 프로세스를 정립하고 꾸준히 이어나가는 이런 부분은 디자이너에게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훗날 테니스계에 페더러와 나달을 뛰어넘는 라이벌이 나올 수 있을까요? 사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페더러에게 더 높은 점수를 줍니다. 교과서를 뛰어넘는 그의 아름다운 백핸드를 보면 테니스가 이렇게 우아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둘 사이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잠시 뒤로하고 메시와 호날두만큼의 라이벌 구도를 형성해온 이 두 유럽 출신의 테니스 라이벌은 플레이 스타일의 차이 때문에 더욱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페더러의 기술 vs 나달의 체력
페더러의 오른손 포핸드 vs 나달의 왼손 탑스핀
페더러의 우아함 vs 나달의 터프함
이 세기의 라이벌 덕분에 전 세계 테니스 팬들은 10년 이 넘는 시간 동안 즐거웠을 것입니다. 이제 이 두 선수의 멋진 플레이를 감상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생각해보면 안타까울 뿐입니다! 훗날 시간이 지나서 2002년 월드컵을 눈으로 본 것을 자랑하듯, 나는 페더러와 나달의 시대를 경험했음을 자랑할 날이 오겠죠.
머리가 빠져도 여전히 섹시한,
수컷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엉덩이 미남 나달을 은퇴하는 그 날까지 응원하겠습니다.
이미지 출처
https://news.nike.com/news/sculpting-clay-nikecourt-takes-shape-in-par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