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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엔에프제이 May 04. 2020

냉장고 사랑

커다란 몸이 좋아!



  “누가 아이스크림 다 먹었어?”

  “난 아냐.”

  “나도 아니거든.”

  나는 징징거린 목소리가 곧 터질 것만 같아 얼른 자리를 피했다.

  눈을 뜨는 둥 마는 둥 더듬거리듯 커다란 몸을 만지더니 목표 지점에 이르러서는 말똥말똥해진다. 거의 매일 같은 일이 벌어진 지 꽤 오래되었다. 그러니까 문을 잡고 힘차게 열 수 있을 때부터지 싶다. 나는 알게 모르게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거나 다름없었다. 괜한 서러움이 불쑥 올라오곤 했다. 물론 누구의 잘못도 아닐 텐데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커다란 몸은 언제나 무한 긍정의 사람을 닮은 듯 일 년 내내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다양한 공간에서 매우 친밀하게 이용할 수 있어서 더욱 사랑받는 존재인 거 같기도 했다. 사는 날 동안 사람들로부터 앞으로도 몇 번의 배신을 당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의 커다란 몸은 날 배신하지 않을 거 같은 안도감이 오늘을 살아내게 한다.   


  잔뜩 흐린 어느 날이었다. 무기력에 빠진 나는 이대로 있다가는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커다란 몸을 닦아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헝클어진 긴 머리를 올려 묶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뭔지 모를 생동감이 내 안에서 꿈틀거렸다. 마치 이제 막 태동을 느끼기 시작한 그때의 묘한 감정이 살아나는 듯했다. 한 생명은 그 작은 공간에서도 살고자 몸부림치며 반응하는데,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넓고 넓은 세상의 한 복판에서 머뭇거리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살다 보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커다란 몸의 도움을 받곤 했다. 그 안에 있는 것 중에 마음에 든 것을 꺼내 와 먹다 보면, 웬만한 스트레스 정도는 단번에 풀리기도 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친구이자 치료자인 셈이었다. 나는 힘들 때마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던 커다란 몸 전체를, 언제 또 변덕 부릴지 모를 감정과 함께 청량음료 같은 느낌이 들도록 닦아 주기 시작했다.

  

  그저 바쁘다는 핑계로 내버려 두었던 차가운 공간에 쌓였던 것들이 문을 열자마자 와르르 쏟아졌다. 도대체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던 걸까. 미안한 마음이 울컥했다. 얼마나 나오고 싶었을까, 꽁꽁 싸매어진 채로 철저하게 고립되어 가고 있었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다. 누군가 꺼내 주기 전까지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텐데, 그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나도 그런 건 아니었을까. 어느새 동병상련의 아픔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미안했던지 좀 더 정성스럽게 닦아주었다. 마침내 빛이 나는 듯 반짝거렸다.

  

  어디에서 힘을 받았는지 연둣빛 에너지가 파르르 춤을 춘다. 나도 덩달아 신이 난 모양이었다. 오래간만이라서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쉴 틈도 없이 일하는 나의 게으른 태도가 무척 대견스러웠다. 그러더니 곧 층별 청소까지 할 태세인지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이제 다 털어낸 걸까. 끈질기게 따라다닌 무기력증 말이다.

  

  커다란 몸 안에서 하나씩 꺼내 논 것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손끝이 빨라진 걸 보니 어쩌면 진즉부터 꺼내고 싶었던 것이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중에는 오래되어 도저히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 군데군데 보였다. 버릴 수밖에 없는, 아니 버려져야 한다는 운명이 너무 쉽게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처참해 보였다. 대상이 누구이든 무엇이든 일찌감치 사랑으로 품을 거였다면 아낌없이 사랑해야 할 것이다. 사랑하지도 않을 거면서 더군다나 먹지도 않을 거라면 차라리 누군가에게 보내주어야 한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세상엔 그 무엇이라도 내 눈에 하찮아 보인 그 어떤 것일지라도 먼저 버려질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하진 않았을 텐데 어쩌다 나를 만나 그 모양이 되었을까. 어떤 상태로든 무관심의 대상은 아플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새삼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허리를 펴고 중간쯤 내려왔더니 달래장아찌에 하얀 곰팡이가 폈다. 한때는 누구보다 사랑했는데, 언제부턴가 눈에 보이지 않는 구석진 자리로 밀려나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누군가 꺼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나는 가끔 눈길만 줄 뿐, 꺼내오긴 싫었다. 그땐 왜 그랬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어쩌면 달래장아찌도 그랬을지 모른다는 이유 있는 아픔이 번개보다 빠르게 가슴을 콕 찌르고 지나갔다.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는데 제대로 지켜지진 않은 거 같다. 그런데 내게로 와 버려진 게 생각보다 많았다. 심지어 엄마의 손때 묻은 정성이 담긴 양파즙까지 말이다. 언제쯤 아낌없이 주기만 하던 그 사랑을 온전히 알 수 있을까. 목이 메었다.   

  

  올봄은 유난히 유별스러웠다.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삶의 시간을 순식간에 마비시킬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싶었다.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커다란 몸 구석구석에 쌓인 것들이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런 까닭인지 오랜만에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깔끔하게 정리된 그 자리엔 또다시 무엇으로 채워질까. 생각지 못한 사회적 거리 두기는 커다란 몸을 더욱 기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하루는 마치 새집으로 이사하던 그 날의 설렘을 방불케 했다. 뚜껑이 있는 지층에는 딸기와 참외가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일 층에는 미나리 초무침과 방풍나물 그리고 주꾸미 볶음용 재료를 올려놓았다. 마지막 층에는 아이들이 좋아한 것으로 빈틈없이 채웠다.


  외출에서 돌아온 가족 구성원들은 충만하게 채워진 커다란 몸을 만지며 자동으로 발사하는 미소를 제어하지 못했다. 워낙에 집 밖으로 나가기 싫어하는 아들이 오렌지 향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른데 앞으로도 지금처럼 꽉 채워주실 거죠?”

 “와, 스트레스 한 방에 날아갈 거 같아요!”

이에 질세라 듣고 있던 딸이 한마디 추가하여 새털만큼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다. 어쩌면 아이들은 질투 날만큼 나보다 커다란 몸을 더 사랑했는지 모른다. 아니 앞으로도 더 사랑할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괜찮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구성원들이 커다란 몸을 중심에 두고 다시 모였다. 주기적으로 괴롭혀 오던 우울한 감정이 목구멍을 통해 들어가더니 다시 나오지 않을 만큼 나의 삶에도 작은 변화가 생겼다. 이쯤이면 어떤 힘듦도 거뜬히 이겨볼 만했다. 그리 큰일을 한 것도 아닌데 참 많은 것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내 삶에서 결코 독립할 수 없는 존재, 크고 작은 기쁨을 함께 나눌 줄 아는 커다란 몸이 좋을 수밖에 없다.


  최신형 냉장고를 사는 날엔 파티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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