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사랑할 수 있는가?
#1
어떤 사람을 돕고 싶지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상황 때문에 그 사람에게 접근하지 못하기도 하고, 그 사람이 우리의 공감과 지지에 마음을 닫고 있을 수도 있다.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에겐 사랑이 있다. 모든 것이 쓸모없어지는 순간에도 우리는 보상, 변화, 감사를 기대하지 않고 여전히 사랑할 수 있다.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면, 사랑의 에너지가 우리 주변의 세상을 변화시킨다. 그 에너지는 항상 제 역할을 해낸다.”
(마크툽 p.280-281, 파울로 코엘료)
#2
책과 노래에서는 사랑에 대한 모든 것들이 쉽다, 특히 남녀간의 사랑은.
사랑이라는 감정은 첫 눈에 갑자기 생기기도 하고, 가시돋힌 말 한 마디에 사라지기도 한다.
사라졌던 사랑의 감정은 꺼진 듯 하다가도 다시 불타오르는 것도 가능하고, 달콤한 언어와 음악에 섞어 누구든 홀리게 할 수도 있다. 사랑한다고 믿는 순간은 누구나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갑자기 달려온 진실의 덤프트럭에 치이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순간에도 사랑할 수 있는가? 그런 말을 하기는 쉽지만, 그런 것을 지키는 일은 매우 힘들다. 자신이 사라지게 되는 것을 예측하게 된 순간에도 변함없이 남을 사랑할 수 있는가?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대로, 그의 눈 앞에 죽음의 그림자가 들이닥치자 미련없이 배반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돈 몇 푼에 예수님을 팔아 넘겼다. 둘 다 처음에는, 훌륭한 제자들이었다. 둘 다 비슷한 잘못을 저질렀다. 하나는 회개했고, 다른 하나는 자살했다.
자, 그렇게 거창한 것부터 생각하지 말자. 위에 적어둔 파올로 코엘료의 <마크툽> 글귀처럼 아무 조건 없이 나 아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랑의 수고에 대한 어떤 보상도, 사랑으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일말의 기대도, 사랑을 받은 상대방이 그 사랑에 절대로 감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할 수 있는가? 되로 받으면 말로 돌려주는 상대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어떤 조언도, 어떤 노력도 물거품이 될 것을 알면서도 지속적으로 사랑할 수 있겠는가? 사랑의 댓가로 증오가 돌아온다면 그래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같은 조건에 더 편한 사랑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랑을 택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그 사랑은 더 가벼운 사랑인가? 더 힘든 사랑은 더 좋은 사랑인가? 진실이 과연 그럴까, <마크툽>의 다른 페이지를 읽으면서 생각해 본다.
#3
스케타 수도원에서 수련 수도사가 니스테로스 신부에게 물었다.
"하느님을 기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니스테로스 신부가 대답했다.
"아브라함은 이방인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하느님은 흡족해하셨다. 엘리야는 이방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자 하느님은 흡족해하셨다. 다윗은 자신이 한 일들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러자 하느님은 흡족해하셨다. 성전에서 세금을 거두는 세리는 자신이 한 일을 부끄러워했다. 그러자 하느님은 흡족해하셨다. 세례자 요한은 사막에 은둔했다. 그러자 하느니은 흡족해하셨다. 요나는 큰 도시 니느베로 갔다. 그러자 하느님은 흡족해하셨다.
너의 마음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아라. 너의 마음이 너의 꿈과 전적으로 일치한다면, 바로 그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다."
(마크툽 p.171, 파울로 코엘로)
- To be continu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