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돌담길과 정동길
우리에게서 기억을 뺐으면 무엇이 남을까...
길고 긴 하루를 어렵게 버티다가도 가끔 떠올리면 나를 웃게 만들어 주는 기억들… 우리는 그런 기억들을 추억이라 부른다. 그 추억 중 어느 것은 어떤 장소와 밀접하게 얽히어 기억에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어쩌다 그곳을 지나치는 것만으로 묵혀 있던 예전 기억들을 떠올리게 해주는 그런 장소. 그곳을 찾아가면 그리웠던 날의 풍경과 향기들이 생각나고 잠시 동안 시간이 멈춘다.
“이 길을 같이 걷는 연인들은 얼마 안가 헤어진대”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그 애가 말했다. 옛날 이곳에 가정법원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속설이 퍼졌다는 얘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정작 말하는 그 애도 그런 말을 믿어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오른편으로 덕수궁의 돌담이 그윽하게 늘어서 있고, 돌담길이 끝날 즈음해서는 1800년대에 세워진 교회와 학교들이 오래된 사진 속에서 막 컬러를 입고 튀어나온 듯 서있는 정동길로 이어진다. 오래된 것들은 왠지 모르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마력이 있다. 그래서인지 그 길을 걸을 때면 이유도 없이 마음이 포근해지고 따듯해졌다. 우리가 그 길을 자주 찾았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몇 번인지 셀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자주 거기에서 데이트를 했고,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오빠 그만 헤어지자”
그 애가 그 말을 한 건, 겨울이 끝나갈 무렵 그 애를 데려다준 집 앞에서였다. 우리가 덕수궁 돌담길을 같이 거닌 것이 십수 번은 더 되었으므로, 그 속설 때문은 아닐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내가 싫어져서 그런 것일 테니 나는 구태여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곳과는 인연이 있어서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덕수궁과 가까운 곳에 취업을 했다. 하지만 그 애와 함께 했던 추억들이 떠오를 것만 같아 매일 같이 그 옆을 지나면서도 차마 그 길로는 한 번도 지나가지 않았다. 그 길을 다시 찾아간 건 그 옆으로 회사를 다닌 지 무려 8년이 지나서였다. 답답한 미세먼지가 열흘을 넘게 서울 하늘을 뒤덮던 날들이 계속되다, 갑자기 눈부시게 파란 하늘이 모습을 내민 그런 날이었다. 꽃향기 가득한 봄날의 따스한 냄새가 어쩐지 그날만은 그 길을 다시 찾아가고 싶게 했다. 봄날의 마법에 이끌려 무심코 다시 찾은 그 길에 들어서는 순간, 오래된 추억이 기다렸다는 듯 마음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 무수한 돌들, 옛날에 살던 사람들이 하나하나 쌓아 올린 거겠지?”
그 애는 그곳에서 늘 옛사람들의 냄새를 맡는 것을 좋아했다.
“옛날에는 여기서 음악회 같은 것이 많이 열렸대”
정동 교회를 지날 때는 어디서 들은 얘기를 하며, 혼자 상상한 거기에서 있었을 법한 얘기들을 마구 늘어놓았다.
“여기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들을 위한 사립학교였대”
이화여고 옆을 지나며, 옛 이화학당에 대해 조사한 지식들을 자랑스럽게 설명하는 그 애의 모습이 활기로 가득했다.
지금의 건축물은 아마도 많은 증축과 개조가 있었을 테니 결코 옛 모습 그대로는 아닐 것이지만, 그 애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거기서 예전에 그곳을 살아간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렇게 상상으로 만든 얘기를 신나서 내게 떠들어 대는 그 애의 옆모습을 보는 것이 나는 한없이 좋았다.
'내게 재잘대는 그 애의 옆모습을 보는 것이 나는 한없이 좋았다'
한참을 추억에 빠져 그 길을 걷다 보니, 함께 그곳에 머물던 그 시간의 우리가 눈에 아른거렸다. 해가 질 즈음, 사람이 없는지 휙휙 둘러보다 재빨리 너에게 입맞춤했던 그 돌난간도 그대로였다. 여기저기 추억이 묻어 있어 금세라도 네가 “오빠” 하고 나를 부르며 나올 것만 같았다.
그 길을 빠져나오며 나는 그 애가 적어도 헤어짐을 그곳에서 얘기하지 않았던 것에 새삼 고마워했다. 끝까지 온통 좋은 추억만 남은 장소로 있게 해 주어 고마웠다. 오랜만에 찾은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길에서 마주한 너와의 추억은 그리웠지만 기분 좋았다. 오랫동안 지운 척했지만 끝내 버리지 못하고 잡고 있던 너에 대한 남은 마음들을 모두 놓아줄 수 있었다.
추억이 있기에 내가 나일 수 있을 것이다. 쌓이고 쌓인 추억들은 내가 있었고, 누군가와 함께 했던 증거들이다. 그리고 가끔 생각나면, 우리 마음을 따듯하게 해 준다. 어떤 장소와 얽힌 추억은 기억 속 장면들을 더 생생하게 떠올리게 해 주기에 더욱 특별하다. 비록 그날 그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지라도, 추억 속의 우리는 계속 거기에 남아, 그곳을 찾을 때마다 나를 반길 것이다.
'내게 추억이 있는 한, 그날의 우리는 계속 거기에 남아 있는 거야...'
*본 글은 '서울 아름다운 건축물 찾기' 공모전에 응모한 작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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