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끝났다. 대낮까지 내리던 비가 그친 후 오랜만에 시원한 저녁이 찾아왔다. 방안 구석구석 벽지에 까지 스며들어 있던 습기가 조금씩 빠져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장마 때문에 굳게 닫아 두었던 방안 창문을 슬쩍 열어보니 비 냄새를 한껏 머금은 공기가 훅 하고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좋아하는 냄새였다. 초저녁의 선선한 기분 좋음에 푹 빠져 있던 그 순간, 문득 너를 생각했다. 여름이 시작하기 전에 만나 여름이 끝날 때 헤어진 너.
“난 오늘 같이 덥고 푹푹 찌는 날이 좋아”
8월 한 여름에 태어나서인지 너는 어릴 때부터 여름을 좋아했다고 했다. 겨울은 너무 추워 밖에 나가는 것조차 싫다고 했지… 하지만 여름은 그 찐득함 조차 사랑스럽다고 했다. 후덥지근함 속에서 생명을 느낀다고 했다. 땀나는 것을 싫어했던 나에게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겨울의 적막함과 고요함을 좋아했다. 눈 내리는 날 따듯한 실내에서 뜨거운 코코아를 마실 때의 그 달달함을 사랑했다.
너와 나는 좋아하는 계절뿐만 아니라 참 많은 것이 달랐다. 너는 아메리카노의 씁쓸함을 좋아했고, 나는 라테의 달콤함이 좋았다. 너는 차가운 음료를 좋아해서 한 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었지… 나는 정말 더운 날이 아니면 뜨거운 음료를 마셨다. 너는 밥보다 고기를 더 좋아했고, 나는 밥 없이는 고기를 먹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너는 하루 종일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지만, 나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어떻게 그렇게 종일 돌아다닐 수 있는지 나에게는 정말 미스터리였다.
너를 처음 만난 날이 비가 몹시 내리던 날이었기 때문일까. 비 냄새가 나는 날은 너를 떠올리게 되는 건 그 이유 때문일지 모르겠다. 검은 리넨 치마에 하얀 면티를 입고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너의 뒷목선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만났던 모든 시간의 모든 모습을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 첫 모습만큼은 농도 짙은 비 냄새와 함께 내 기억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더운 여름을 좋아하던 네가 장마까지 좋아했는지는 미처 물어보지 못했다. 아마도 좋아했겠지... 나는 원래 비 오는 날을 싫어했지만, 그 날 이후로는 비 냄새에서 너의 냄새가 나기 때문이었을까, 비가 오는 날이면 왠지 모를 포근함이 느껴졌다. 너의 기억은 그렇게 생각나면 따스해지는 포근함이 되었다.
너와 3번째로 만난 날 너에게 고백을 했었지. 아무 낌새도 채지 못했다는 듯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던 너의 놀란 표정을 바로 어제일 처럼 기억한다. 사실 네가 둔감해서 눈치채지 못한 것이지, 모를 수 없을 만큼 그렇게 티를 많이 냈는데 말이야. 그래도 금세 새침 대는 미소로 "그래"라며 받아 준 그 순간의 설렘이 얼마나 기분 좋았던지... 함께한 시간에 어디를 갔고 무엇을 먹었고 무엇을 함께 했는지, 그 순간의 세세한 기억은 대부분 사라지고 뭉툭하고 덩어리진 형태로서만 기억에 남아있다. 세세한 사실보다 더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그때 내가 얼마나 설레었고, 우리가 얼마나 즐겁게 웃었고, 그 날의 네가 얼마나 예뻤는지, 그 순간의 느낌과 감정이다.
헤어지던 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던 그 순간을 수천번 후회했다. 마지막으로 손 흔들며 작별 인사하던 너의 얼굴은 처음 만난 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뜨거웠던 여름만큼이나 우리가 가장 열렬했던 날들의 나를 보던 미소 그대로 바라봐 주었다. 그날의 나로 돌아갈 수 있다면… 뒤돌아가 너를 껴안았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너를 안고 보내 줄 수 없다고 붙잡았다면, 지금 우리는 아직도 연인 사이일까. 의미 없는 후회로 얼마나 많은 시간 나를 괴롭혔는지...
오랜만에 모습을 내밀었던 태양이 거의 지려 하고 있었다. 산등성이 주변으로 연분홍의 노을이 조그맣게 물들어 있고, 그 위로는 짙은 저녁 색의 하늘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아직도 낮까지 내린 비 냄새를 머금은 바람이 내방을 조금씩 채워간다. 한여름, 8월 어느 선선한 초저녁에 나는 잠시 동안 너를 생각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우리의 시간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