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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리형 Aug 30. 2022

그날의 공기

아름답게 빛나는 젊음

대학로에서 너와 함께 연극을 보고 나와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너는 뜬금없이 산책이 하고 싶다며 나를 조르기 시작했고, 결국 우린 가장 가까운 산책코스였던 낙산산성 둘레길을 오르기로 했다. 언덕길은 생각보다 가팔랐다. 습기 가득한 공기와 몸으로부터 나오는 열기에 입고 있던 셔츠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차오르는 숨을 간신히 참아가며 오르막길을 끝까지 오르자, 서울 시내의 아름다운 밤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날의 공기는 유난히도 맑아서, 멀리 서울타워의 불빛이 눈앞에 틀어 놓은 TV의 방송 대기 신호만큼이나 선명하게 보였다. 신이 나서 깡총깡총 뛰듯이 몇 걸음이나 앞서나가는 너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실없는 웃음을 끝도 없이 흘렸다.


"뭐가 그렇게 신나는데?"

"몰라! 그냥 신나!"


뒤돌아보며 대답할 때마다 통통거리는 네 모습이 하도 귀여워 나는 짓궂게도 계속 말을 걸었다. 목선을 따라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도톰한 한쪽 귀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날씨는 습했고 빠르게 언덕을 올라온 너의 이마에는 작은 땀방울이 총총히 맺혀있었다. 풀잎과 밤공기와 너의 웃음. 아름답게 빛나는 젊음.


해가 지기 직전의 하늘은 참 예쁘다. 하늘색이 노랗게 조명을 켜기 시작하면, 세상은 시끄럽던 볼륨을 줄인다.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는 말간 쓸쓸함이 번져 간다. 멍하니 내다보던 창문 밖으로 그날의 마지막 햇살이 지나고 나면, 나는 또 외로움을 붙잡고 하늘을 본다.


손가락을 쭈욱 뻗어보니 한 손에 건져질 거 같았던 달이 새초롬히 멀어진다. 결코 닿을 수 없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잡히지 않는 걸 잡으려 했던 내가 한참을 바보같이 느껴져 그제야 웃음이 났다. 네가 떠나던 날의 내 모습이 딱 이랬을까... 아니, 웃을 일이 아닐지도 몰라. 여태껏 살아온 시간의 대부분이 그때의 나와 별로 다르지 않다면 어쩔래?


너의 눈이 나의 옆모습에 멈추던 순간을 떠올려 보다가, 너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밑그림 그려본다. 얼굴의 전체적인 형태를 그리고 나서, 눈 코 입을 넣으려다 보니, 너의 표정이 잘 떠오르지를 않는다. 어쩌면 함께 했던 그 긴 시간 동안 너를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눈으로는 너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서, 마음속에는 담아두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너의 표정이 제대로 생각날 리가 없지.


너로 인해 세상을 볼 수 있었던 날들이 너로 인해 사라졌다. 한때 간절했던 것들이, 이제는 아무것도 아니 게 되는 날이 오면, 괜스레 슬퍼지는 이유는 무얼까? 그토록 소중했던 존재의 의미가 허무하게 사라진다는 사실에 실망을 해서일까? 시간이 지나면 당연한 건데... 인정해 버리면 지는 기분이라도 드는 것처럼, 쓸데없이 분해하고는 했다. 그런다고 감정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의미가 의미를 잃는 그 순간의 상실감을 쉽게 인정할 수가 없었나 보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난 뒤에야 나는 알 것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를 생각하기에 하루가 시작될 수 있고, 너를 생각하기에 하루가 끝이 날 수 있었다는걸. 오늘도 달은 무던히도 하늘을 오른다. 하루를 마무리했다는 안도감이 너의 생각과 함께 뒤늦은 오늘을 보내준다. 하루의 마지막 일초가 다하는 순간에 맞추어 너의 얼굴을 떠올리면, 그다음 하루의 시작도 너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하겠지. 오늘의 끝과 내일의 시작의 틈 사이에는 작은 균열이 있어서, 나는 그 틈새 안으로 자꾸만 지나버린 기억을 밀어 넣는다.


쉽게 담아둘 수 없던 의미와 쉽게 떠오르지 않는 감정을 억지로 잡아두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사라져야 하는 건 사라지도록 내버려 둬야지. 오늘은 하루의 끝이 오기 전에 잠이 들 것이다. 내일은 아무것도 없는 빈자리에서 다시 시작해야지. 그리고 그 하루가 가기 전에 모두 놓아줄 것이다. 아스라이 피곤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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