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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May 11. 2019

놓고 오다

어디든지 자리에서 일어날 때면 앉았던 곳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 예전에 밤늦게 탄 택시에 최신형 스마트폰을 깜빡 놓고 내렸다. 부랴부랴 위치추적 화면을 실행했으나 서울 거리를 떠도는 응답 없는 폰의 자취를 슬프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떠난 폰은 오랜 할부금을 남겼고, 확인 습관의 시작은 아마 그때부터로 기억한다.


앉아서 하는 모든 일은 만남이다. 앉아서 사람을 만나고 음식과 만나고 영화와 책을 만나며 가끔 꿀잠도 만난다. 앉음과 만남을 통해 흘러가는 삶에서 그때그때 잘 챙겨야 할 것이 있다.

나비는 여기저기 꽃을 만나 앉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암술에 꽃가루를 놓고 온다. 생각해보면 나도 그렇다. 소지품은 이제 잘 챙기지만 무엇인가 놓고 오는 것이 있다. 아침에 잠시 앉아 꿀잠 잤던 지하철 자리에는 피곤을 놓고 왔고, 주말에 갔던 영화관 자리에는 감동을 놓고 왔으며, 어제 들렀던 상갓집 자리에는 위로를 놓고 왔다.

성북동 길상사에 가보면 법정 스님께서 생전에 머물던 진영각 마루 한쪽에 스님의 나무 의자가 있다. 투박한 의자 위에 스님은 무소유의 맑고 향기로운 말씀을 놓고 가셨다.


삶이라는 자리에 앉았다 가면 누구나 좋든 싫든 흔적을 남긴다. 요즘 내가 앉는 자리에 무엇을 남기고 있는지, 혹시 짜증과 위선이나 게으름을 놓고 오는 건 아닌지. 삶에서 좋은 것을 많이 놓고 오도록 자리를 더 잘 살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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