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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May 11. 2019

연기의 맛

세상은 대형마트 시식코너처럼 "맛 한번 보고 가세요." 하며 불러 세워 공짜로 맛있는 것을 주지 않는다. 대신 가끔 악당을 대하는 흔한 애니메이션처럼 "어디 한번 맛 좀 봐랏!" 하며 후려쳐 뜨거운 맛을 보여주곤 한다. 세게 맞고 정신 차려 보면, 나는 내 영화 시나리오에서나 선한 주인공이었지 다른 어떤 이의 시나리오에서는 악역이었음을 깨닫는다.

삶의 시작과 끝을 한 편의 영화에 비유한다면 세상에는 사람 수만큼 많은 영화가 동시 상영 중이다. 어느 영화는 아직 초반이고, 어느 영화는 한창 흥미진진 진행 단계다. 혹은 이미  끝나서 엔딩 크레디트에 출연 배우들 이름이 올라가고 있거나, 이제야 시작해서 "빰빠라바~"하며 제작사 로고를 선보이고 있는 영화도 있다.

는 내가 연출하는 영화에선 주연으로, 서로 다른 주변 사람들이 연출하고 주연하는 수많은 다양한 영화에는 조연과 엑스트라로 출연 중이다. 출연하는 영화마다 감독과 배역이 달라 내 캐릭터도 천차만별이다.


얼마 전에는 만원 지하철 속 바삐 움직이는 다른 행인의 배낭에 얼굴 한 대 툭 맞는 어이없이 억울한 행인으로 출연했고, 오늘 집 근처 마트 계산원의 영화에선 갑자기 신용카드가 아닌 신분증을 내미는 웃기는 손님을 연기했다. 우리 집 막내의 영화에서 나는 감독의 의도를 툭하면 무시하며 불평을 늘어놓는 아빠 역으로 영화의 초반에 출연 중이고, 이제 후반부를 달리고 있는 어머니의 영화에선 점점 출연 빈도와 시간이 줄어들고 있는 무심한 아들 역을 맡고 있다.

한 해가 마무리되는 시즌이면 방송사마다 연기 대상, 연예 대상 같은 시상식을 중계한다. 왜 우리가 한 해의 마무리를 연예인들 상 주고받는 것들을 보면서 보내야 할까. 1년 내내 정말 열심히 서로의 영화에서 주연으로, 조연으로, 때로는 엑스트라로 연기해온 우리들인데, 각자의 다양한 배역에서 최선을 다한 서로를 격려하고 감사도 표하는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건 바로 우리들인데.

우리는 맡은 배역에서 모두 신인들이라서 발연기 작렬하는 한 해를 보냈다. 그렇지만, 나중에 각자의 영화가 끝나고 앤딩 크레디트 올라올 때 그래도 서로 출연배우 앞자리 순서 어딘가에 이름이 오를 사람들 아닌가. 가끔은 "아, 이게 연기의 맛이구나." 하며 찡한 감동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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