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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Aug 04. 2019

걱정 안 해도 되는 일

중학생 딸과 둘이 사흘 동안 싱가포르에 휴가 여행을 다녀왔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반나절, 워터파크에서 반나절, 루지와 짚라인 등 주로 액티비티가 많은 일정이었다. 가족 여행과는 달리 여행 중에 혼자 아이를 챙겨야 하다 보니 놀러 가는 것이긴 하지만 계획 짤 때부터 무사히 다녀올지 걱정도 되었다.

첫날 갔던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평일인데도 사람이 무척 많았다. 기구를 타고 체험하는 것이 많아서 그때마다 소지품을 보관함에 넣어야 했다. 특히 거꾸로 몸이 뒤집히는 롤러코스터 같은 경우에는 주머니에 지갑을 비롯하여 아무것도 넣지 못하게 했다. 

그곳 보관함은 지문을 인식하여 짐을 넣은 후 나중에 지문으로 찾게 되어 있었다. 소지품을 다 넣고 가다 보니 순간 걱정이 들었다. 그 안에 돈이며 카드며 카메라며 다 넣었는데 지문 인식이긴 하지만 누가 문을 억지로 따고 몽땅 꺼내 가면 어쩌나. 보관함이 좀 외진 곳에 있는 것 같은데 만약을 대비해서 비상금이라도 좀 빼고 넣을 걸 그랬나. 무지막지 비틀고 회전하며 떨어지는 롤러코스터도 무서웠지만 그런 걱정이 실제로 일어나는 상상 역시 무서웠다.

영화 미이라(Mummy)를 체험하는 곳 옆에 있는 보관함은 시스템이 달랐다. 생년월일을 넣고 자기가 좋아하는 색을 고르면 보관함 번호가 뜨고 그곳에 물건을 넣으면 잠기는 방식이었다. 차례로 입력하니 보관함 번호가 떴는데 그게 어디 있나 찾았더니 바로 등 뒤에 있던 청년이 저기라고 가르쳐주었다. 짐을 넣고 보니 또 걱정이다. 내가 말도 안 했는데 번호를 어떻게 알고 알려주는 거지? 혹시 내가 넣는 숫자들을 뒤에서 다 보고 있었나? 그가 번호를 기억했다가 몽땅 꺼내 가는 것은 아닐까? 체험에 등장하는 미이라도 무서웠지만 짐을 찾기까지 그런 걱정도 또한 무서웠다.

정작 걱정되는 상황은 그다음 날 찾아왔다. 워터파크에서 오후까지 시간을 보내고 늦은 점심 후에 호텔 근처에 짚라인을 타고나서, 다시 시내 쪽으로 트램과 모노레일을 타고 가는 길이었다. 딸이 가방을 보더니 스마트폰이 없다고 했다. 아마 아까 트램 기다리던 정류장에서 뭔가 꺼내다 흘린 것 같단다. 이미 30여 분 시간이 흘렀고 정류장은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다. 잃어버렸다 싶었지만 그래도 한번 다시 돌아가서 찾아보기로 했다. 일정이 좀 어긋나도 할 수 없었다.

길을 되짚어 그 자리에 가봐도 역시 없었다. 유심을 바꾼 내 폰으로는 전화가 되지 않아 호텔로 돌아가 리셉션의 도움을 얻어 딸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단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떤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며 만날 장소를 메모해서 알려준다. 멀지 않은 곳이었다. 딸과 한걸음에 달려가서 이미 문 닫은 놀이터 관리소 앞에서 스마트폰을 받았고, 그제야 딸이 안도의 울음을 터뜨렸다. 누군가 정류장에서 발견해서 근처에 있는 놀이터에 맡겨놓고 갔던 것이었다.

누구나 걱정을 하고 산다. 일이 잘되어가고 있으면 혹시 잘못 틀어지면 어쩌나, 잘 안되어가면 계속 안 되면 어쩌나 걱정한다. 사람은 애초부터 신체적으로 약한 존재라서, 맹수나 독충 등의 공격이 있을까, 안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무엇이든 걱정하고 조심하는 유전자를 품고 있다. 걱정 없이 태평하고 무지하게 용감무쌍했던 선조들은 아마도 그 용감성 때문에 후손에 미처 유전자를 남길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죽어버려서, 현생 인류는 다들 걱정 유전자를 필수품으로 지니고 사는 것 아닐까?


사실 우리가 걱정하는 많은 일들의 대부분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거나, 걱정해봐야 내가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마음의 평정을 추구했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구별해서, 뜻대로 할 수 없는 일들은 수용하고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그것을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정의했다.

딸과의 휴가 여행은 잘 다녀왔다. 걱정했던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거나 무사히 잘 해결되었다. 12년 만에 찾은 싱가포르는 전보다 훨씬 볼 것이 많아지고 사람들로 활기찼고, 현지 사람들은 친절하고 정직했다. 어린아이인 줄만 알았던 중학생 딸은 생각보다 의젓한 여행 파트너가 되어주었다. 있을 수 있는 일은 받아들이고, 조금 덜 걱정하고 살아도 충분히 삶이 즐겁지 않을까 조금 더 깨우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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