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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Oct 09. 2019

그만두는 일

10년 가까이 해오던 머리 염색을 그만두었다. 튀어나오는 새치 때문에 시작했다가 지금껏 계속되었다. 감추는  계속되면 드러내는 어려워듯, 염색한 머리가 본래인 양 여기고 습관적으로 감춰왔다. 생각의 변화는 갑자기 찾아왔다. 그냥 그만두고 싶어졌다. 두피에 좋지 않다는 것은 그냥 들기 쉬운 이유일 뿐이었다.


염색을 그만두고 몇 달이 지나 주위에서 조금씩 반응이 다. '너도 이제 흰머리가 많이 늘었네', '요즘 뭐 힘든 일 있으세요?', '이제 염색 좀 시작하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하는 반응도 있었지만 제일 많은 반응은 무반응이었다. 가까운 이들도 '그랬었니?' 했다. 사람들은 직접 자기와 관련되지 않은 일에 생각보다 관심이 없다.

염색은 기원전 3천 년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에서 시작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과거 사람들은 새치를 감추거나 신과 비슷한 머리색을 갖기 위해 염색을 시작했다고 한다. 숨김이나 치장의 목적이라는 점에서는 지금과 마찬가지다. 나에게도 그동안 염색은 숨기기 위한 목적이었다.


한 손에 막대 잡고 한 손에 가시 쥐고 백발을 막는다는 고려 말 시조 '백발가'를 들추지 않더라도 예부터 흰머리는 노화의 상징이었다. 예전에는 그래도 나이가 들며 경험이 쌓여 지혜가 깊어진다는 인식이 있었다면, 요즘은 그냥 세상 변화에 처지는 꼰대가 되는 걸로 생각이 바뀌어 간다. 그래서, 노화를 늦추는 안티에이징 시장은 점점 커져간다. 염색은 역사 깊은 페이크 안티에이징 수단이 되겠다.

오랫동안 염색을 반복하다 보니 그동안 내 머리 색의 변화를 모르고 지냈다. 그래서 혹시 염색을 멈추면 반백의 머리가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했었는데 다행히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일을 벌이기 전에는 조심스럽지만 막상 하고 나면   아닌 경우가 있는데 이번 일이 그랬다. 그냥 자연스레 넘어간다. 앞으로는 머리를 좀 더 길러 펌을 해보려고 한다. 염색을 그만두었으니 머리의 제 빛깔이 이제 거울만 보면 드러나겠다.


우리는 무엇인가 새로 시작하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고 준비하고 노력하지만 그만두는 것에 대해서는 그만큼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안 해도 될 일로 삶을 계속 채우고, 정작 꾸준히 해야 할 일은 흐지부지 그만두고 있다. 시작하는 일을 챙기는 것도 좋지만 그동안 무엇을 그만두었는지,  이제 그만두어도 될 일이 없는지 오래된 서랍을 정리하듯 가만히 속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조금만 지나면 이제 단풍의 계절이다. 단풍은 잎의 본래 색이 엽록소가 광합성을 그만두면서 발색되는 과정이다. 나뭇잎은 낙엽으로 떨어지기 전에 자기 본연의 색을 찾는다. 염색을 그만둔 일도 본연의 색을 찾는 과정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새로 시작하는 일에는 결심이 필요하고 무엇인가 그만두는 일도 마찬가지다. 삶에서 머리에 단풍이 찾아오는 시즌이거니 여기며 뭔가 결심할 일에 대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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