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래도 Feb 08. 2020

그냥 나가지 마세요

영화가 끝났다. 음악과 함께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감독과 제작자, 주연의 뒤를 따라 점점 많은 이름의 행렬이 스크린을 채운다. 조연과 엑스트라, 스턴트 같은 출연자뿐 아니라 조명, 소품, 편집, 음악, 분장, CG, 운전사, 매니저, 회계와 투자 담당까지 수많은 이름이 줄 맞추어 올라온다. 각자 맡은 분야에서 완성도를 높이려 애쓴 영화계 종사자 하나하나의 이름에서, 출퇴근과 가족, 생계와 미래 사이 고민하며 살고 있는 주위의 평범한 이웃을 떠올린다. 엔딩 크레딧은 제작에 수고한 모든 이를 소개하는 커튼콜 같아서 가만히 앉아 각자 참여한 분야와 이름을 보며 영화의 여운을 나눈다.

영화 산업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보통 엔딩 크레딧에는 감독과 주요 출연자 이름 정도만 소개되었다. 그러다가 1973년 조지 루카스 감독이 '청춘 낙서(American Graffiti)'를 만들 때, 제작비 부족에도 도움 준 배우와 스태프들에 감사하기 위해 모두의 이름을 넣은 것이 관례가 되었다. 작품에 참여한 모든 이를 예우하는 영화의 엔딩 크레딧은 유사하거나 다른 장르 예술과 구별되는 독특한 부분이다. 가끔 영화는 엔딩 크레딧 끝에 쿠키 영상을 삽입하여, 자리 털고 일어서려는 관객을 붙잡아놓기도 한다. 마치 "이분들이 있어서 영화가 완성된 거예요. 그런 거는 좀 보고 가셔야죠." 하는 것처럼.

영화의 시선으로 둘러보면 모든 사물에도 각각 엔딩 크레딧이 숨어있다. 한 잔의 커피에도 커피콩을 수확하고 말려 운송하고 볶고 갈아서 내리는 과정에 있었던 많은 사람이 담겨있다. 과테말라 산지의 커피 농부, 운송하는 벌크선 선원, 추출 기계 공장 노동자, 커피 체인점 바리스타의 이름이 커피 향이라는 엔딩 크레딧으로 천천히 올라온다. 주연인 커피콩을 비춘 조명 담당에는 Sun이라는 이름이, 짙은 갈색 메이크업 담당에는 Fire라는 이름이 올라올 것이다. Moon과 Star나 Wind는 보조 출연 정도에 이름을 올리려나. 커피는 컵에 담겨 엔딩 크레딧을 남기며 그의 영화를 마무리한다. 우리는 영화가 끝나면 바삐 자리를 뜨는 관객처럼 무심하게 커피를 마시며 향을 즐길 뿐이다.

엔딩이 있는 모든 생명은 각자 언젠가 올라올 크레딧을 만들며 산다. 사람도 마찬가지라서 돌이켜보면 엔딩 크레딧을 미리 엿볼 수 있다. 뭔가 어렵고 복잡한 일이 무사히 풀렸을 , 눈에 띄지 않는 스턴트맨이 있지 않았을까. 어느 순간 최고로 밝게 빛나는 시간을 보낼 , 한쪽에서 반사판 높이 들고 비추던 조명 기사가 있지 않았을까.  흘리며 혼자 길을 힘들게 걷는다 생각할 , 곁에 붙어  닦고 화장을 고쳐주던 분장 사가 있지 않았을까. 삶에서 허기지고 지친 순간 나타나 끼니를 챙겨주던 밥차 담당 기사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면 순간순간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 삶의 엔딩 크레딧에서 그들의 이름을 발견하고 나서야 놀라거나 후회하거나 슬퍼하지는 말아야겠다. 그러기 위해 조금 지루하더라도 영화에 담긴 많은 이의 노력에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마음으로 가끔은 엔 크레딧을 살펴보아야겠다. 그 시간 동안에라도 내 삶의 엔딩 크레딧 이름은 누가 올라올지도 잠깐은 생각해보면 좋겠.


이전 12화 날씨가 좋다는 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