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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Feb 26. 2020

키스는 해주지 그랬어

영화 '책도둑(The Book Thief, 2013)' 감상문

리젤은 책을 훔치지 않았다. 무덤 파는 이가 눈밭에 흘린 책은 주웠을뿐이고, 광장에서 불에 타 사라질 책은 옷 속에 품어 구했다. 더는 읽을 사람 없는 시장 부인 책은 빌려 읽었고, 맥스가 안고 자던 책은 그냥 잠시 넘겨보았다. 다만 책 주인 허락을 받지 않았고 위험을 감수했다는 점에서는 도둑질과 통했다. 그렇게 몰래 '훔쳐 온' 책은 훗날 그녀만의 이야기를 짓는 바탕이 되었는데,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은 '책도둑 Book Thief'이다.


그 시절 진짜 도둑은 당당했다. 이웃 나라 영토와 인간성, 정의와 진리를 훔치고 짓밟는 나치라는 도둑의 위세 앞에 양심은 움츠렸고 용기는 점차 숨어들었다. 올바른 일일수록 몰래 행해질 수밖에 없던 시대였다. 영화는 그시절 작은 마을 헤븐의 한 집에 각기 다른 이유로 들어온 이방인 리젤과 맥스를 비롯한 주민들이 보여준 양심과 용기를 그렸다.

긴 여행길에 동생을 잃고 입양된 어린 리젤은 읽고 쓰는 법조차 몰랐지만, 책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진 소녀였다. 그녀는 나치를 피해 지하실로 숨어든 아픈 유대인 청년 맥스와 책을 같이 읽고 서로 도우며 꿈을 키웠다. 주위 사람의 선량한 인간애는 그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리젤의 새아빠 한스는 첫날밤 리젤이 혼자 자장가를 읊조리며 잠들자 다음 날 아침 아코디언으로 자장가를 연주하며 위로한다. 크리스마스를 지하실에 숨어서 보낼 수밖에 없는 맥스와 폭격을 피해 대피소로 모여든 주민에게 들려준 따뜻한 연주는, 이웃 편에 서서 나치에 맞서는 양심과 용기로 승화되었다. 시장 부인과 로사는 날카로운 눈매나 천둥 같은 성격을 지녔으나, 시간이 지나며 그녀를 잔잔하게 배려하는 모성애를 드러내었다.

'키트비'. 맥스가 리젤에 선물한 노트 속표지에 적은 ’Write’라는 뜻의 단어다. 맥스는 삶의 비밀을 자기만의 언어로 표현할 때 비로소 살아있는 것이라며, 백지 노트에 그녀의 이야기를 채워넣기를 권한다. 경험이 마음 밭에 닿으면 이야기가 싹트고 자라서 꽃을 피운다. 책으로 다져진 그녀의 마음 밭에 피어난 이야기는 한스의 연주가 사라진 방공호를 채워 주민들을 위로하며 꽃을 피웠다.


영화는 저승사자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지상에서 영혼을 거두어가는 일을 하는 그는 리젤이 90년을 살면서 글로써 사람들의 영혼을 어루만져주었다고 전했다. 아마도 그녀의 글은 책도둑 시절 헤븐 마을에서 경험한 배려와 양심, 그리고 용기에서 싹텄을 것이다.

다만 이웃집 소년 루디에 대한 리젤의 태도는 아쉬웠다. 루디는 외톨이인 그녀를 처음 만나면서부터 살갑게 다가가 곁을 지키며 헌신적 사랑을 보냈다. 묵묵히 그녀를 기다리며 비밀을 지키고, 필요하다면 얼음물에 뛰어들고 프란츠나 군인에게 맞서는 일도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그런 루디가 몇 번이나 부탁했는데 나름 적당한 분위기에도 그녀는 끝내 키스하지 않았다.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죽은 뒤에 입 맞추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책도둑의 입술을 훔치치 못한 착한 루디가 안타까웠다. 키스는 좀 해주지 그랬어.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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