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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Sep 13. 2020

덜어내고 채워지고

날씨 좋은 점심, 한강으로 산책하러 나갔다. 장마가 강폭을 넓혀놓아 아직 몇몇 나무들은 불어난 강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상 댐에서 장마철 가득 담아놓았던 물을 내려보내니 수위가 좀처럼 낮아지지 않는다. 유난히 길었던 장마철, 강의 상류에서 댐들이 물을 가두어 그나마 하류에 큰일을 막았다.

댐에 물을 가득 채워놓으면 넘치거나 무너질 위험도 커진다. 조금 덜어내어 비워놓고 가는 것이 자연에 가깝다. 나무도 필요 이상의 물은 땅으로 흘려보내고, 다람쥐도 제 먹을 만큼 이상의 도토리를 모아놓지 않는다.


우리 몸도 우리 일상도 그렇다. 과한 것보다 조금 모자란 것이 고, 덜어내면 새롭게 채울 수 있다. 과도한 칼로리나 과로는 몸에 지방을 쌓아 몸을 약하게 하며, 새로운 피는 헌혈 후에 금방 몸을 다시 채운다. 근심을 덜어낸 자리에 희망이 차오르고, 어린 새는 둥지 속 어둠에서, 아기는 엄마 품 속 공간에서 편안함을 찾는다. 술도 가득 채우지 않아야 서로 잔을 부딪치며 빈 곳을 즐거움으로 채우고 나눌 수 있다. 덜어내는 일은 비우고 나누며 채우는 일이다.

무엇인가 채우려는 욕심을 덜고, 마음을 정돈하여 공간을 찾으면 좋겠다. 덜어내면 조금 모자라 보이지만, 모자란 것과 부족한 것은 다르다. 예전에 도시락 안 가져온 친구와 한 숟갈씩 모아 나누어서 여럿이 같이 점심을 먹을 때, 다들 조금씩 모자라지만 부족하지 않았다. 


글을 쓰는 것도 덜어내는 일이 된다. 엉켜있던 생각과 감정을 글로 내려놓고, 글 사이 깃든 생각을 읽고 또 읽으며 단어와 문장 사이 군더더기를 계속 덜어내어야 글이 완성된다. 덜어내며 정돈되는 글과 함께 마음도 따라 정리되어 하나의 글이 된다.

오늘은 강에 물이 많았고, 물살이 힘을 받아  긁어내짙은 흙색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댐이 충분히 물을 덜어내 뻘을 한 꺼풀 벗겨낸 강은 전보다 더 맑아질 것이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시간은 바라보고만 있으면 나의 것이 아니다. 흐름을 막고 덜어내고 채우고 나누며 정돈할 때 비로소 나의 시간이 된다. 깊게 쌓였던 흙을 물살에 함께 덜어낸 후, 가을 하늘 아래 푸르고 잔잔히 흐르는 한강을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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