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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Dec 09. 2020

불리는 일

얼마 전부터 길을 걸을 때 왼발 새끼발가락이 아팠다. 아, 그분이 또 오셨구나 했다. 1년에 두어 번 잊어버릴 만하면 찾아오는 손님, 티눈이다. 티눈은 이를테면 딱딱하게 뭉친 굳은살이다. 어떤 부위에 마찰이나 압력이 반복되어 각질이 생기는 것이 굳은살인데, 그게 뾰족하게 뭉쳐지면 티눈이 된다. 어쨌든 걸을 때마다 계속 느껴지는 둔중한 통증이 불편했다.


지난번 쓰고 남아 넣어둔 티눈 밴드를 꺼내 발가락을 감았다. 티눈 밴드 중심에는 '살리실산'이라는 성분이 발라져 있다. 보통 클렌징폼 재료로서 각질을 제거할 때 쓰이는데, 농도를 높이면 티눈 제거용 의약품이 된다. 짙은 농도의 살리실산은 밴드를 갈아붙이는 동안 닿는 부위를 점점 부옇게 불려서 티눈과 함께 떼어낸다. 나는 항상 그랬듯이 이번에도 살리실산이 티눈을 잘 불려 아픔에서 나를 살리실 것을 믿고 기다리기로 했다.  

딱딱한 것은 그대로 무엇을 하기보다 일단 불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 티눈이 거슬린다고 그냥 생살을 뜯어내려다가는 오히려 상처만 생겨 더 아프게 된다. 쌀도 콩도 미역이나 밤도 충분히 물에 불려 놓으면 손질하기 훨씬 수월해진다. 연꽃 씨앗을 발아시켜본 일이 있다. 단단한 껍질에 둘러싸인 연꽃 씨앗은 물에 넣어 한참을 불려야 껍질 사이로 싹이 슬며시 고개를 내밀어 자란다.


침잠의 시간은 굳은 것을 불려 부드럽게 만든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딱딱해진 마음을 불리면 시간을 머금고 점점 풀어져 간다. 부드러워지고 손질하기 쉬워진다. 마음을 불리는 것은 자신이나 상대를 믿음에 담그고 시간을 두어 살피는 것이다. 무엇인가 섣불리 한다는 말은 충분히 불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섣부른 마음은 단단한 티눈처럼 자신이나 다른 이에 아픔이 된다.   

다만 너무 오래 불리면 좋지 않겠다. 슬픔과 우울은 불어 터진 마음이다. 마음을 형체 없이 흐물거리는 것으로 가득 채운다. 라면이나 우동은 면이 적당히 불어 올랐을 때 탱글탱글 가장 맛있다. 오랜 시간 불리다가 푹 퍼져버리는 것이 마음이다. 조바심도 게으름도 피하는 적절한 시간. 마음에 대한 좋은 레시피를 잘 만들어 가는 것이 좋겠다.


어젯밤에 드디어 티눈과 작별했다. 불어 오른 피부와 함께 떨어져 나갔다. 피부는 곧 다시 돋아날 것이지만, 내 걷는 습관은 그 자리에 또 티눈을 자리 잡게 할 것이다. 아마도 내년 봄날 언제쯤 발가락을 쿡쿡 찌르며 돌아왔음을 알리지 않을까?


산다는 것은 어쩌면 계속 찾아오는 티눈을 불려 없애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는 아픔이 찾아오거나, 나의 성격이나 습관이 만드는 일들이 반복되거나, 무엇인가 마음속에 점점 뭉쳐 딱딱하게 느껴지거나 하는 일... 그럴 때는 우선 마음을 한번 불려보는 것이 좋겠다. 일단 부드럽게 만들고 지켜보다 보면, 주위에 살은 좀 같이 떨어질 수도 있지만, 티눈은 불려 떨어지고 새살은 생각보다 다시 빠르게 돋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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