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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Dec 03. 2020

흔적을 남기다

늦가을 햇빛은 부드럽다. 짙푸른 하늘에 부서지는 따뜻한 빛이 지상에 내려와 시드는 꽃들과 뒹구는 낙엽을 감싼다. 가을은 부드러운 뒷모습을 보이며 머문 곳 여기저기 흔적을 남기고 있다. 사라지는 곳에 남기는 것을 흔적이라 한다. 공룡의 흔적은 쓰러진 곳에 화석으로 남아있고, 깊은 협곡은 예전에 그곳에 강물이 흘렀던 흔적이다. 계속 머무는 것에는 흔적이 없다. 이를테면 별이나 달, 바다 같은 것. 그래서, 결혼을 사랑의 흔적이라거나 피곤함을 일의 흔적이라 부르면 조금 어색하다. 흔적은 결국 떠나감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쓸쓸하다.

관광지에 가면 경치 좋은 난간에 자물쇠들이 빼곡히 매달려 있는 곳이 있다. 연인들이 사랑의 기념 문구를 적어놓고 잠가놓은 자물쇠가 난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비바람과 햇볕에 녹슬고 색 바랜 모습은 아마도 대부분 이루어지지 못한 쓸쓸한 사랑의 흔적이다. 책과 음반에 작가나 가수의 사인을 받으려 줄을 서거나 오래된 식당 벽에 굳이 다녀갔다는 낙서를 남기 음식 사진을 열심히 찍어대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래도 뭔가 남기고 싶어 하는 존재들이다. 일상의 흔적을 그렇게 남겨 간직한다. 흔적은 기억을 보호한다.


코로나 시대는 흔적이 강요되는 세상이다. 출입 명부를 작성하고, 안에 뭐가 담긴지도 모른 채 QR코드를 찍는다. 사실 전에도 수많은 디지털 장치들은 모르는 사이 우리 발자국을 좇고 있었다. 카페나 패스트푸드점에서 나오며 머물렀던 흔적을 정리하는 모습은 CCTV가 찍고 있었고, 사랑의 흔적을 지우러 떠난 여행의 루트는 GPS에 기록되었다. 파일을 휴지통에 넣고 비우기를 실행해도 어딘가에 흔적을 남겨놓았다. 세상은 흔적을 없애려는, 흔적을 추적하는, 흔적을 남기려는 일들 사이에서 흘러간다.  

영화 '스틸 앨리스' 포스터 (출처 : 네이버 영화)

한 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흔적은 '기억'이다. 기억은 선별하여 남길 수 없는 일상의 흔적으로 삶의 연속성을 책임지고 있다. 그래서, 기억이 사라지는 이는 우리에게 점점 낯선 존재가 되어간다. 영화 '스틸 앨리스(Still Alice,2014)'는 알츠하이머로 인해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주인공 앨리스에 관한 이야기이다. 제목이 인상 깊으면서 안타깝다. '기억을 잃어 저를 몰라보지만, 당신은 저와 항상 얘기를 나누며 일상을 함께하던... 여전히 제가 사랑하는 앨리스입니다.'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Call me by your name,2017)'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보조 연구원으로 찾아와 여름을 지냈던 청년과 자신의 열일곱 살 아들이 서로 사랑에 빠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와 이별의 아픔을 겪고 있는 아들 곁에 앉아 차분히 얘기를 전한다. 지금 겪는 슬픔과 고통을 없애려 하지 말고 네가 느꼈던 기쁨의 기억과 함께 간직하라고. 느끼지 않으려 하면 마음이 닳아 없어진다고. 그리고 아버지가 여기 있음을 기억하라고. 아들은 점점 아버지 곁으로 다가와 머리를 기댄다. 그 순간의 기억은 그의 마음에 흔적으로 남아 앞으로 살아갈 힘이 되었을 것이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출처 : 유튜브 Screenplayed)

나무는 매년 꽃을 피우고 잎을 떨구는 같은 생활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줄기 속에 일 년의 흔적을 나이테로 단단히 쌓고 있다. 우리는 몰라도 나무는 품고 있는 나이테로 알고 있겠다. 올 한 해 얼마나 성장했는지. 나는 역사나 인류에 흔적을 남기거나, 지질학자나 생물학자처럼 흔적을 열심히 탐구할 생각은 없다. 다만 적어도 지구의 한 순간을 스쳐 가는 존재로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좋은 기억을 남기고 그들의 흔적을 챙기며 살아가는 정도는 해야겠다 생각한다. 흔적이 쓸쓸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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