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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Apr 16. 2021

믿고 맡기는 일

"안녕하세요. 제가 이 달 말까지만 근무하고 퇴사하게 되었습니다." 다니는 미용실 부원장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보통은 그런가 보다 하며 지나갈 수 있는 일이겠지만 나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세어보니 24년. 사회에 나오면서부터 같은 미용실에서 계속 내 머리를 맡아주던 분이었다. 직접 차린 미용실도 아닌 브랜드 미용실 명동점 한 곳에서만 26년 근무한 흔치 않은 경력을 가진 분이다. 사실 을지로, 강남, 여의도회사를 옮기면서도 명동에 있는 미용실 한 곳 24년 다닌 내 경우도 흔하진 않겠다. 아무튼 이제 어디다 머리를 맡겨야 하나... 메시지를 보는 순간 머리카락이 찌릿했다.


24년간 달에 한 번 이상 만났으니 가족을 빼면 그렇게 오래 자주 만난 이가 없다. 서로 신입 언저리에 만나서 고참이 되기까지 길게 이어진 인연이다. 물론 잠시 한 눈 판 적도 있었다. 십여 년 전, 명동 근처에 있던 회사가 강남으로 이사했을 때 집과 회사에서 모두 거리가 있는 명동을 떠나 이 참에 강남권의 미용실로 옮겨보려 했었다. 그러나, 커다란 통유리의 화려한 미용실에서 "어떻게 해드릴까요?" 하는 물음에 갈 때마다 애매한 설명을 해야 했고 그동안 못 듣던 염색을 하시라느니 두피 케어를 받으셔야겠다는 말을 반복해서 듣고 나서, 머리 깎으러 갔을 뿐인데 손관리를 받으라며 뜨거운 파라핀액에 손을 담그고 나서, 열기가 손에서 채 가시기 전에 나는 결심했다. 명동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다 과묵한 편이라 긴 세월 별 대화도 없이 지냈지만 오랜 친구 같은 믿음이 다. 내가 "염색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물으면, "한번 하면 계속하셔야 할 텐데 안 해도 괜찮은데요." 그랬다. "알아서 해주세요."라는 말도 굳이 필요 없이, 앉으면 그냥 스륵스륵 알아서 가위질이 시작되었다. 다니는 동안 한겨울 보일러 고장으로 얼음물에 머리도 감아보고, 염색약이 흘러 여기저기 묻기도 하면서, 가르마 방향을 바꿔보기도 하고, 염색을 했다가 그만두기도 하고, 머리를 볶아보기도 하면서 미용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도 많이 변해왔다.   

믿고 맡기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단골 미용사에게 머리를 내맡기는 것처럼 무엇인가 그냥 믿고 맡기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다른 이에게 무엇이든 의존해야 살아갈 수 있는 세상에서, 이것저것 재거나 의심 없이 마음을 줄 수 있는, 생각과 좀 다른 결과가 나와도 그런 이유가 있겠지 하며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누구나 제 몫의 힘듦은 갖고 태어나는 세상이기에 그 몫을 서로 나누어 소진해가는 과정이 삶이라면, 믿고 맡기는 일이 많을수록 삶은 간결하고 편안해진다.


'이제 이 미용실도 마지막이네.' 하며 작은 선물도 준비해서 미용실을 찾았다. 무슨 일이냐 물으니 지금 있는 미용실은 떠나지만 일을 그만두는 것은 아니라 했다. 이제 미용실을 차리고 싶다며, 장소를 알아볼 동안 지인이 운영하는 에서 일을 도와줄 계획이라 그쪽으로 올 수 있냐고 물었다.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이었다. 적어도 머리만큼은 당분간 믿고 맡길만한 곳이 있겠다. 잘 생각하셨다고 축하한다고 했다. 이별 선물은 응원의 선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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