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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Oct 04. 2021

내 방은 궁전

이사를 하루 앞두고 집에 살았던 여러 흔적을 지운다. 벽에 붙여 놓았던 포스터나 사진들을 떼어내고 자국들도 꼼꼼히 없앴다. 있던 것들이 사라진 벽이 낯설고 허전하다. 이사 날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왜 이리 아쉬운가 했더니 신혼 이후로 가장 오래 살았던 곳이었다. 익숙해질수록 그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일은 힘들다. 이사를 겪으면서 마음은 사람에게도 머물지만 장소에도 머문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어릴 적 오래 살았던 고향집에서 이사할 때가 떠올랐다. 형들과 키를 재고 그어놓은 줄들이 흔적으로 남은 문틀, 큰 솥 위에 앉았다가 엉덩이를 크게 데었던 부뚜막, 가끔씩 기어올라 별을 바라보았던 기와지붕, 아빠 담배를 몰래 가져다 피워보며 캑캑댔던 뒤뜰 한구석. 장항선 기차가 지나가며 울렸던 경적 소리와 생쥐가 천정 위를 가로지르며 다다닥 거리는 소리가 들렸던, 보름이면 달빛이 마치 눈이 쌓인 것처럼 하얗게 마당을 비추던 우리 집 풍경. 동네 가게에서 과자 박스를 얻어와 미리 포장해놓은 짐들을 거들어 같이 나르느라  바빴지만, 마음 한구석 아쉬움이 가득해서 골목을 나서며 자꾸만 뒤돌아 보았던 이사 날의 추억.

이제는 포장 이사가 대세라서 짐을 미리 싸놓지 않아도 되는 시절이 되었다. 그래도 몇몇 깨지기 쉬운 물건들은 뽁뽁이로 따로 포장을 해서 상자에 미리 넣어 챙겼다. 머물러 있을 때는 필요 없지만 어딘가로 움직이려면 충격을 흡수하는 포장이 필요한 것들이 있다. 안 그러면 움직이는 와중에 흠집 나거나  깨지는 것들. 짐뿐 아니라 마음도 그렇지 않은가 생각했다. 어디에 또는 누군가에 그냥 머무를 때는 괜찮지만, 자의건 타의건 거두어 다른 곳으로 움직여야 할 때는 뽁뽁이 같은 게 필요한 마음.


"직사광선 드는 아담한 거실에선 빨래도 뽀송뽀송. 기타에 부딪힌 햇살에 무지개가 뜨고, 포근한 담요 양말 공기가 나를 감싸고, 수 없는 방황이 적힌 내 파란 일기장 내 마음 위로하는 마음 넓은 책들. 낡았지만 편한 외투가 걸려있고 꼬깃꼬깃 작은 추억 스며든 이곳. 머지않아 허물어져 흔적도 없어도 이곳은 내 마음속 궁전이에요"  


싱어송라이터 정밀아는 '내 방은 궁전'이라는 곡에서 '계단 몇 개는 내려가지만' 반지하는 절대 아니라는 말을 믿고 이사한 집에서, 생각보다 햇살이 잘 비추고 좋아하는 사물들이 함께 하니 그곳이 바로 궁전이라고 노래한다. 그래, 어딜 가든지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아끼는 친숙한 물건들과 같이 있다면 그곳이 궁전인 것이지. 그렇게 생각하니 이사하는 마음이 뽁뽁이를 두른 듯 훨씬 퐁실해졌다.

이제 이사온지 며칠이 지났다. 짐들이 하나둘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면서 집이 점점 사는 꼴을 갖춰갔다. 옛집에 대한 기억은 바쁘게 정리하는 와중에 생각보다 빠르게 사라져 갔고, 그동안 딸애는 생활 소품점을 왔다 갔다 하더니 뚝딱뚝딱 자기 방을 나름 소굴이라면 소굴이고 궁전이라면 궁전같이 꾸며놓았다.


마음은 머물기도 하지만 결국 어딘가로 흘러가게 되어있다. 다만 마음과 함께 머물 때는 맑게 머물도록, 흘러갈 때는 마음을 타고 편안히 흐르도록 약한 것들은 뽁뽁이로  감싸야겠다. 평소에 뽁뽁이를 잘 챙기고, 필요하면 내가 뽁뽁이가 되어주는 것도 좋겠다. 그렇게 가는 곳마다 마음을 풀어놓고  머무르면 그곳은 항상 새로운 시즌의 궁전이겠다. 내 방은 궁전!


https://youtu.be/6I_s_3QCQo4

정밀아 - "내 방은 궁전" (유튜브 Jeongm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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